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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행정

[2012 아젠다 점검]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 개혁

현재 한국 정치는 이제 불신을 넘어 조롱거리와 탄식의 대상이다. 한국 정치의 위기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이제 정치에 대한 기대를 말끔히 회수하는 수준에 이른 것 같다. 정치에 부는 ‘바람’만 해도 그렇다. 2002년 노무현 현상, 이른바 노풍은 한국 정치의 비주류지만 그래도 정치인에 속했던 故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기대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2011년 ‘안풍’은 정치를 하지 않을 것 같은 기업인을 상대로 한 신드롬이다. 두 현상은 언뜻 유사해 보이지만 전자는 국민이 그래도 정치인에게 정치개혁을 맡긴 것이지만, 후자는 정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어버렸다는 의미이다. 국민의 마음에서 한국 정치는 구제불능의 낙인이 찍혀버렸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 정치는 역동적이었고 특히 민주진영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이는 정치발전으로 이어져 1987년 개헌과 민주화로 접어드는 결실을 거두었다. 이후 한국은 문민정부와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했고 인권과 복지, 평화와 균형 같은 한 단계 진전된 민주적 가치들도 수면 위에 올렸다. 그러나 그 뿐, 지금은 민주화 이후 가장 심각하게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인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고 있으며 민주진영도 더 이상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치는 발전을 멈추고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

한국 정치가 퇴행을 넘어 불신과 조롱의 대상이 된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 정치가 의당 넘어야 할 발전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데 있다. 1987년 체제는 유신과 5공의 군부독재 잔재를 청소하고 민주국가로의 이행과 공고화의 역할만을 맡은 과도적 체제이다. 대통령 5년 단임제와 소극적 기본권에 대한 강조에 치우친 헌법 체제, 가장 단순한 선거제도인 소선거구제와 득표율에 따른 전국 단일 비례대표제 등은 여기에 초점을 맞춘 제도들이다. 그렇다 보니, 정치적 책임성과 효율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고, 정치적 기득권 구조의 공고화나 권력기관의 전횡을 견제하고 균형을 이룰 제도적 심모원려 역시 미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 체제는 민주정부 10년을 탄생시킴으로써 일단 민주화의 과제를 완성하였고, 그 역사적 역할은 다했다. 그 결과 한국인의 정치적 관심은 민주적 가치가 준수되면서도 효율적이고 책임성을 확보하는 권력구조, 법과 원칙에 기반하고 타협과 조정이 준수되는 정치, 공정과 합리에 기반한 국정 운영, 충분히 기능하면서도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권력기관 등에 돌려지고 있다. 한마디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여당인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를 이끌었던 민주진영조차 성숙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과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요구를 선도하기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하는 정치가 국민의 불신과 조롱을 받는 상황에서, 국민이 다른 곳에서 정치적 희망을 찾으려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정치개혁의 아젠다는 성숙한 민주주의의 달성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특히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과 공고화를 달성했던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비민주성과 무능, 부패의 반사적 이익에 머무르지 말고, 다시는 이런 정부가 출현할 수 없는 성숙한 민주주의 달성의 과제를 선도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총선 승리나 재집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이 선진정치로의 문턱을 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길이다. 물론,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혁과 사회·문화적 개혁 모두가 필요하다. 그러나 단기간에 모든 개혁 의제를 내고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번 총선과 대선에서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몇 가지 핵심적인 제도 개혁 의제들을 제출하여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집권 이후 꾸준히 개혁 과제들을 발굴하고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핵심적 의제로서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개헌 - 2013년 체제의 구축 

한국의 권력구조는 5년 단임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되, 위상과 권력 면에서 매우 불명확한 국무총리제 및 내각의 구성 및 의회와의 관계에서도 대통령제와 의회정부제를 절충한 형태를 택하고 있다. 이는 세계에서 드문 구조이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95개국 중 단임제를 택하고 있는 국가는 단 12개뿐이다. 아울러 대통령이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면서 수상(국무총리)을 따로 두고 있는 국가는 한국과 스리랑카, 가나의 단 3개국뿐이다. 물론 드물기 때문에 고쳐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권력구조는 모범답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정치적 전통과 상황에 맞춰서 설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공적으로 운영된다 해서 다른 나라의 권력구조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은, 갓 쓰고 양복입고 나막신 신는 꼴을 면할 수 없다.

권력구조를 설계하려면, 먼저 한국의 전통과 상황을 먼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이미 60년간 대통령-국무총리제를 운영해 왔으며, 민주화 이후 20년간 정부와 여당이 정책을 협의하는 행정부-정당-의회 구조를 유지해 왔다. 따라서 미국식 정부통령제와 행정부-의회 구조, 또는 유럽식 내각제가 아무리 국가를 훌륭하게 운영해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전통과 상황에 딱 맞는다는 확신이 없는 한, 근본적인 권력구조 개편으로 인한 논란과 혼란을 감내할 이유는 찾기 어렵다. 사실 미국식 정부통령제는 한국의 정당구조 및 정치 문화와 조화되지 않는 면이 크고, 내각제는 대통령제의 전통이 강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권력구조 변경을 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환의 비용이 클 뿐 아니라, 지역적, 계층적, 정치적 기득권 구조가 강력한 상태에서 오히려 기득권 구조를 공고화시키는 결과를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현행 프레임을 유지하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관계의 제도화, 행정부와 의회 관계의 재조정을 통해 한국형 이원정부제를 구축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대선과 총선 동시 선거나 2년에 의원 절반을 개선하는 구조를 만들면서 국무총리 임기제를 채택할 수도 있고,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국정을 분담하되 상호 견제권을 부여함으로써 효율성과 책임성을 민주성과 조화시킬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형태는 국민에게 익숙하고 운영의 묘도 축적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환의 비용이 가장 적다는 것이 장점이다. 아울러 단임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87년 체제에서 단임제는 민주화 이행과 공고화를 위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지만, 이미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이상, 단임제가 가진 약점들인 책임성과 대응성의 약화, 조기 레임덕의 빈발, 국정운영 기간의 단기성 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권력구조와 함께 개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기본권 구조다. 87년 체제가 민주화 헌법으로서 국민의 소극적·방어적 권리를 상대적으로 강조했다면, 2013년 체제는 점점 더 그 중요성이 더해지는 적극적 기본권 보장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기본권 조항은 매우 논쟁적이다. 유럽형, 나아가 북구형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진보와 미국형 신자유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보수 사이의 격렬한 논쟁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따라서 이 정치적 논쟁을 결정할 수 있는 기제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인데, 대선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2012년은 절호의 기회라고 본다.

 

2012 대선부터 단계적 개헌을 검토해야

 

권력구조건 기본권 조항이건 현재처럼 당파적 이해가 국가적 이해보다 우선하는 정치 현실에서 집권자나 다수당이 개헌을 제안하는 것은 별로 성사 가능성이 없다. 정치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선 국면에서는 양자가 대등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등한 논쟁과 결단이 가능하다. 각 후보가 개헌안을 마련하여 논쟁하고, 승리한 후보 쪽의 개헌안을 받아들이도록 각 주요 정당이 대국민 약속을 한다면, 개헌에 대한 논쟁을 최단기간에 끝낼 수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대통령 임기 개시 일까지 개헌을 위한 프로세스 기간은 충분하며 개헌 내용은 부칙을 통해 2013년 임기를 개시하는 대통령에게 적용될 수도 있다. 이런 프로세스라면 최소한 권력구조와 기본권 조항 등은 국민적 합의의 형식을 획득할 수 있다.

물론 이외에도 한반도 문제라든가 국회와 감사원 관계, 사법구조 등도 개헌 논의의 대상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보면, 개헌에서 모든 이슈를 한 번에 다루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 좀 유연하고 단계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87년 체제를 넘는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일이지 개헌을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정치권의 합의가 있다면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할 수도 있고, 합의되지 않는 사안이라면 다음 대선을 기다려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헌법 개정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는 1958년 이후 개헌을 무려 25차례나 했으나 그것 때문에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이 우리보다 컸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며, 우리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프랑스 국민에 비해 현저히 낮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논쟁적 사안은 대선을 통해, 합의 사안은 총선과 지방선거를 통해 꾸준히 개선해 나간다는 단계적 개헌 방식의 검토를 제안한다.

 

2. 선거법 개정 -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연합정치 장벽 철폐 

지역주의와의 제도적 대결 : 권역별 비례대표제 

지역주의는 단순히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지지세가 강하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 구조와 문화, 국가 운영과 지역 행정의 왜곡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핵심적 요인이다. 정당 구조의 후진성 및 정치적 기득권 구조의 재생산, 정치적 갈등의 격화를 조장하며, 지역 행정 능률의 저하와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 물론, 지역주의가 한국 정치의 후진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아니지만,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6.2 동시지방선거는, 비록 PK 지역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강고한 지역주의에 균열의 기미를 보여준 동시에, 도지사 선거를 제외한 나머지 PK 지역과 TK 및 호남 지역에서 여전히 지역구도가 강고함을 재확인해 주었다. 이런 흐름은 다음 총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역구도는 정치적, 경제적 문제뿐 아니라 감성적 요인까지 겹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주의 완화를 위한 제도개혁의 필요성은 여전히 크다.

지역주의 완화의 첩경은 지역의 정치적 다양성을 확산시켜 특정 정당의 지역적 독점을 깨뜨리는 데 있다. 영남에는 민주당 계열의 국회의원이, 호남에서는 한나라당 계열의 국회의원이 지역을 대변하는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라 최소한 당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규모여야 한다. 이들이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대변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마침내 지역 대표로 당선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제도 개혁의 목표여야 한다. 이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권역별 비례대표제나 독일식 정당명부제, 석패율제 등 다양한 방법들이 제안되어 왔다. 그 중 우리 현실에서 가장 쉽고 국회의원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제도는 아마 석패율제이겠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미약하고 기득권 구조에 얽매이기 쉽다. 독일식 정당명부제는 그 제도적 복잡성과 유동성 때문에 국민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제도로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제도는 최소한 100개 정도의 비례대표 의석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원 정수를 50명 가량 확대하거나 지역구를 50개 정도 축소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양자 모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문제를 계속 회피하는 것은 문제를 키울 뿐이다. 방법은 여러 가지로 강구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역구를 일부 조정하면서 국회의원 정수를 늘이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국회의원은 수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 의원 1명당 인구수로 보면, 우리는 16만 2천여명으로 OECD 회원국 30개중 네 번째로 많다. 우리와 인구 규모가 비슷한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독일은 13만 4천여명, 프랑스는 11만 1천여명이다. 물론, 정치가 불신 받는 상황에서 의원 정수만 늘리자는 것은 여론의 반감을 자극할 일이다. 하지만 전체 정치권 차원에서 합의하고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대의를 알리면서 일부 지역구를 통폐합하는 등 기득권을 내려놓는 자세를 취한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연합정치의 장벽 철폐와 촉진

 

한국은 대통령제 국가이면서도 연합정치의 경험이 낯설지 않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선거연합을 구성한 경험이 있으며 6.2 동시지방선거에서도 선거연합이 광범위하게 구축되었다. 이는 한국이 소선거구제를 택하고 있고 지역에 기반을 두면서 정책적으로 차이가 있는 두 주요 정당의 좌우에 군소정당들이 위치하고 있는 정당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선거연합은 지역주의 구도와 대결적 정치문화 속에서 정치적 다양성을 억누르고 군소 정당 지지자들의 투표를 사표로 만들고 있는 현 정치 현실에서, 사표를 최소화하고 국민의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장려될 필요성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선거법은 정당 내 경선과 사전선거운동 금지 조항으로 정당 통합이 아닌 정당 간 연합을 통한 후보자 선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이는 기존 거대 정당들의 기득권 보장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국민의 민주적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연합정치가 가진 순기능, 즉 정치적 다양성을 보장하면서도 정치적 안정성 증진 및 대화와 타협을 촉진하여 민주주의의 성숙에 기여하는 기능을 억누르는 효과도 있다. 따라서 정당 연합체내 경선을 허용하거나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등의 제도 개혁을 통해 선거연합을 좀 더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선거법 개정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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