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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사회시장경제

- 서문-


2012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미국이 앞장서고 국제금융자본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는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로 종언을 고했다. 위기는 월가의 도덕적 경제적 파탄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고삐 풀린 금융세계화의 위험성을 웅변으로 증명했다. 물론 미국, 금융자본, 신자유주의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아니며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직 새 시대의 주체와 패러다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신자유주의가 새롭게 소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선진 각국에서 재정위기와 사회정치적 위기가 계속되는 현실이 이를입증한다. “위기는 바로,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 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한 그람시의 말이 더없이 적확한 상황이다.
세계경제를 옥죄고 있는 금융위기와 재정위기, 그리고 그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양극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경제체제를 수립해야만 한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만으로 해결될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근본적 개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새 시대를 향한 핵심적 요구는 경제민주화다. 1%를 위해 99%를 희생시키는 경제체제를 거부하고, 이제 경제는 99%를 위해 작동해야 한다. 시장논리 못지않게 민주주의가 중요하고, 자유 못지않게 평등도 중요하다. 사람이 시장의 도구가 되어선 아니 되며, 시장이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세계화도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공공복리의 증진에 도움이 되도록 규제하고 조정해야한다. 이것이 곧 ‘월가 점령 시위’에 담긴 시대정신이고, ‘한미FTA반대 촛불집회’에서 타오르는 대중의 요구인 것이다.
새 시대는 더 이상 미국주도, 미국헤게모니의 시대가 아니다. 세계경제의 중심은 빠르게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규모는 이미 미국이나 유럽연합을 능가했으며, 불과 5년 후면 구매력기준으로 중국경제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최대의 경제로 부상할 전망이다. 무엇보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제전망은 비관적인데 동아시아 지역은 역동적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고도성장이 수 십 년간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도 “중국은 국유기업 구조조정을 못해서, 금융부실 때문에 망한다” 혹은 “중국은 소득불평등 때문에 정치불안이 야기되어 망한다”고 희망 섞인예측을 해대던 서구의 전문가들은 정작 미국과 유럽의 경제가 바로 그런 문제들로 자멸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넘어왔다고 해서 동아시아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나름대로 심각한 사회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경제상황은 상이할지라도 양극화 문제는 각국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최대 현안이다. 일본은 이 때문에 이미2009년에 60년 자민당 정권이 막을 내렸고, 눈앞에 닥친 대만 총통선거나 내년의 한국 총선과 대선에서도 양극화는 최대 이슈로 부각될 것이다. 중국의 농민시위나 반부패시위도 양극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어서 내년에 출범할 제5세대 지도부에게도 최대 현안은 양극화 문제가 될 것이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북한의 정권이양 과정이 추가적인 불안요인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2012년은 동아시아 지역의 정치적 격변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세계경제의 모순과 동아시아 지역의 고민을 고스란히, 어쩌면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한국경제는 한 세대 남짓한 기간에 세계최빈국에서 OECD 회원국까지 올라섰지만, 그 후로는 금융위기의 쓰라림과 양극화의 어두움으로 상당 부분 퇴색하고 말았다. 재벌대기업의 이윤은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증가하는데 실질임금은 바닥을 기고 있다. 한국국민은 경제는 성장하고 국민소득은 올라가는데 삶의 질은 하락하고 행복은 멀어져가는 역설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OECD국가 중 최장시간 노동, 최저수준 복지,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G20 회원국으로서 한국의 국가위상은 단군 이래 가장 높아졌다는데 삼포세대라고 자조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희망과 기백을 잃어 가고 있다. 세계 최하의 출산율로 민족의 집단자살을 꾀하고 있는 형국이다.
모순이 극에 달한 만큼 변화의 기운도 강한 것이 한국의 상황이다. 외세의 침탈과 식민지배, 동족상잔과 군사독재 등 모진 시련이 이어진 역사의 질곡을 뚫고 나온 민족의 저력은 이제 새 시대를 여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2012년, 한국은 새로운 발전패러다임 아래 새로운 정치주체의 결집을 이루어 내어 새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 인본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새로운 사회경제모델을 건설해야 한다. 한국이 동아시아 정치변화의 물결을 이끌고, 사회통합적인 동아시아 지역경제 통합을 주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은 세계경제가 위기를 완전히 극복하고, 금융불안과 소득불평등 문제를 넘어서서 지구촌의 공생발전과 생태계보전 문제까지 해결해나가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마침내 한국이 ‘동방의 빛’이 되어 세계를 비추어야 한다.
한민족의 저력을 새 시대의 동력으로 만들고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정치가 감당해야 할 몫 이다. 2012년, 한국 정치는 참으로 중차대한 역사적 임무 앞에 섰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아직도 구시대의 포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지역주의와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은 나타나고 있으나, 구시대의 낡은 경제관과 각종 기득권 세력과의 결탁을 아직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파탄과 점증하는 민생고 탓에 모든 정치세력이 앞 다투어 복지를 말하게되었다. 하지만 정의에 기초하며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를 수호하고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사회경제체제의 근본적 혁신에 대한 구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편적 복지든 맞춤형 복지든 사회경제체제의 혁신이 없이는 그 의미가 퇴색하고 말 것이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경제체제의 전환을 위한 비전과 정책구상을 구체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새롭고 폭넓은 정치주체를 결집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민주진보진영의 대동단결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민주진보진영이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에 걸쳐 민주정부는 민주화와 인권신장, 남북관계 개선과 복지제도 확대 등에 큰 공을 세웠으나,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과 성장주의 경제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양극화와 고용불안이 심화되는 것을 방지하지 못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로 확장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진보세력의 분열과 갈등이 확대되었고,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민주주의가 총체적으로 후퇴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이제 민주진보진영은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비전과 정책구상을 가다듬어서 이를 기초로 정책동맹을 형성하고, 시민사회와 소통하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감을 절감하여 정책포럼 기획위원회는 성찰과 고민을 거듭하였다. 부족하지만 우선 그 결과를 이 보고서에 담아 내놓는다. 우리가 내세우는 새로운 사회 비전은 국민의 ‘행복’을 최상위 가치로 놓는 국가발전체제로서 경제민주화·혁신적 성장·보편적 복지를 중심축으로 삼고 아울러 생태적 발전·능동적 세계화·지역균형발전을 지향한다. 우리는 그 같은 가치와 비전을 담아내는 경제체제를 ‘사회시장경제’라 명명하고자 한다.
사회시장경제란 민주적 시장경제에 보편적 복지를 결합시킨 한국형 발전모델이다. 민주적 시장경제는 경제영역에서 시장의 자율적 역할을 인정하되 사회 공동체 전체의 존립과 발전의 목표에 맞게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조정할 수 있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사회시장경제는 이 같은 민주적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여기에 보편적 복지제도를 강화함으로써 좀 더 적극적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재분배를 촉진하고자 한다. 우리가 민주적 시장경제에 더하여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는 이유는 시장경제의 기초가 되는 자유와 경쟁의 원리를 평등과 연대의 원칙으로 보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나아가 공동체의 유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본 보고서 작성을 위하여 함께 고민하고 토론한 집필자들과 정책포럼 의 회원들, 그리고 보고서 준비에 큰 수고를 해준 박정식 연구위원, 유공주 연구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모쪼록 부족한 이 보고서가 민주진보진영의 새로운 비전과 정책 구상과 관련한 보다 심도 깊은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민주진보세력이 2012년에 주어진 엄청난 역사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기를 기대한다.


2011. 12. 23
정책포럼 기획위원장 | 유 종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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