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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대중과 대한민국의 미래

민주주의자 김대중과 대한민국의 미래


박순성(민주정책연구원장)


1. 인간 김대중

김 전 대통령의 삶을 . . . . 조각조각 설명한다고 해서, 그의 인생 드라마 전부와 그 위대함을 다 담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 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이들을 사로잡은 그의 인생을 돌아봄으로써 그의 삶의 핵심을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2008년 8월 4일 말레이시아 대학에서 받은 명예인문학 박사학위 수여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고인께서는 이희호 여사께서 대신 참석해서 받으신 이 박사학위의 수여문을 각별하게 생각하시면서 “표현의 격이 높았다”(2:574)고 평가하셨습니다. 아마도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온전히 바라보고 담아낼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적절히 표현하면서도 김 전 대통령의 “삶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핵심을 짚어낸 말레이시아 대학의 수준에 만족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김 전 대통령의 삶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김대중 자서전????에서 그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민주주의, 정의, 평화, 민족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중용의 철학 속에 일관된 인생을 살자고 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는 내게 닥친 다섯 번 죽음의 고비, 6년 동안의 옥중 생활, 수십 년간의 감시와 연금, 망명 생활을 극복했다. 나는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음의 확인이었다. 그래도 어찌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내 고난에 동참하여 나를 일으켜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진정 고맙다. (2:602)

모든 고난에, 죽음의 고비에조차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으려고 했던 노력, 고난을 함께 하면서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잃지 않았던 마음, 인간 김대중의 참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의 고난은 단지 한 사람의 인생 수난사가 아닙니다. 그는 20세기 우리 민족과 민중의 엄혹한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 역사의 생생한 증언입니다. 고인 스스로도 자신의 삶이 역사와 분리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업가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앞줄 맨왼쪽)

 

나는 일제 강점기, 해방, 군정, 전쟁, 분단의 시대를 살았다. 우리 역사에 이보다 험한 시기가 있었던가. 격랑, 격변, 격정의 세월이었다. 나는 세상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옳다고 여기면 정면으로 부딪혔다. 어떤 협박과 회유에도 꺾이지 않았다. (1:20)

그의 삶은 윤택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았습니다. 스스로 고백하였듯이, 그는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악과 부귀영화의 유혹에 무수히 흔들렸습니다. 험한 시기에 바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목숨을 잃는 칼날 위”(2:602)에서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불의와 폭력을 일삼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올바른 정치를 하려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투쟁이었습니다. 자연히 정치를 왜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일어난 정치 파동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나는 정치를 증오하거나 정치인을 폄훼하지 않았다. 정치인은 현실의 장에서 국민과 힘을 합쳐 국민을 괴롭히는 구조적인 악을 제거해야 한다. 사람을 근본으로 여기고,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여는 정치야말로 어쩌면 가장 성스러운 것 아닌가. (1:21)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여는 정치, 민주주의가 모든 곳에서 꽃피는 세상을 만드는 정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구조적 악을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를 진정한 정치로 생각했습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참으로 깊었습니다.

진정한 정치가 할 일은 억압받은 자와 가난한 자의 권리와 생활을 보장하고 그들이 정치의 주체로서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억압하던 자와 빼앗던 자들도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시켜서 대열에 참여케 해야 한다. 여기서 정치는 예술이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상입니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진정한 정치에 대한 그의 신념은 모든 인간을 위한 해방의 철학으로, 종교적 깨달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모내기하는 김대중 대통령(가운데 밀짚모자)

 

그런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를 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앞에 그토록 험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진정 몰랐습니다.”(1:11) 고인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돌아보면 아득하지만 들춰 보면 격정의 순간들이었다.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2:602) 민주화를 향한 긴 투쟁에서 겪었던 수많은 위험을 하나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대통령이 되신 뒤, 민주적 시장경제를 이루어내고 통일을 향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2. 민주주의자 김대중의 길

정치인 김대중은 우리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키워나갔습니다. 그 자신은 결코 스스로를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가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몸 바쳐 노력한” 정치인이 되고자 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1:21). 그의 생애는 “늘 길 위에 있었기에 고단했지만”, 그는 자신과 타협하지 않았고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끊임없이 공부했습니다(1:21-2). 민족과 민중의 고단한 삶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여 마침내는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어우르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로서 거듭 태어났습니다. 분명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넘어 21세기 세계사 속에서 민주주의자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김대중은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민족의 현실에 자연스럽게 눈을 떴습니다. 그는 조선어 수업이 폐지될 때 느꼈던 슬픔과 창씨개명이 가져다주었던 굴욕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독서를 좋아하나 사물을 비판적으로 보니 주의가 필요함”(1:678)이라는 목포공립상업학교 학적부의 기록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으로 치닫고 있던 시절에 식민지 청년이 겪었을 일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합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해운 회사를 경영하기도 하고 조선소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 지부에 가담했습니다(1:58-9). 불행하게도 해방 공간은 혼란과 분열의 시기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남북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른바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념 대립으로, 신탁통치 문제로, 결국에는 자신과 자기 세력의 이해에 따라 갈라지고 싸웠습니다. 좌우합작을 표방하는 신민당에 들어갔다 탈퇴했던 김대중은 1946년 10월 이후 상선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5월 평소에 존경하던 서재필 박사의 대통령 출마를 요청하는 데에 서명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는 신민당을 떠난 후에는 현실 정치를 거의 떠나 있었습니다.

분단된 조국은 전쟁의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인간을 야수로 변하게 만드는 이념과 전쟁을 본 뒤, 김대중은 “평생 민족의 화해와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1:82) 살았습니다. 전쟁 중에 사업은 번창했지만, 운명은 그를 정치로 이끌었습니다. 임시 수도 부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새롭게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정치인 김대중이, 민주주의자 김대중이 태어나게 되는 계기를 그는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강제연행되는 김대중 대통령

 

오래전부터 나는 정치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나름대로 정치적인 소질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사변과 또 하나의 사건을 겪으면서이다. 바로 한국전쟁과 부산 정치 파동이었다. 나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도자가 거짓말하는 것을 보았다. . . .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인권은 짓밟히고 생명과 재산도 지켜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선(死線)을 넘으며 가슴에 몇 번이나 새겼다. . . . 또 하나는 국민의 이름으로 폭력을 동원하여 집권을 연장했던 부산 정치 파동이었다. . . . 나는 국민을 섬기는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면 국민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정치가 제자리를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나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내게는 가슴 뛰는 사건이자 고난의 시작이었다. (1:90-1)

목포에서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경영자로서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노력했으며, 노동자의 주장과 입장을 편견 없이 평가하고 인정했습니다. 관권 선거는 그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온 뒤, 한국노동문제연구소에서 주간으로 활동하며 노동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한때 경영인이었던 김대중은 노동 문제로부터 정치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김대중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 대중경제의 실현 방안에 대해, 그리고 인권에 대해 쉬지 않고 연구하는 정치인으로 발전합니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위선적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 1960년 4월 혁명 전후에 정치인 김대중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거리에 나섰습니다. “독재 정권에 목숨을 내놓는 일”(1:117)은 1960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흘린 핏자국 위에 세워진 민주당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습니다. 5·16은 “무력을 동원한 권력 탈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1:145) 그러나 무력에 의해 싹이 잘린 민주주의를 되찾고 꽃을 피우기 위해, 김대중은 사반세기 동안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야했습니다.

목숨을 건 투쟁을 하면서도 정치인 김대중은 중용의 철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4·19혁명의 성공을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고 어떤 용공적인 슬로건도” 내걸지 않았던 시민들의 ‘성숙한 시위’에서 찾았습니다(1:120). 야만적인 박정희 정권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도 그는 언제나 민심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민, 특히 중산층이 고개를 돌리면 어떤 투쟁도 성공할 수가 없다. 세계의 흐름, 민심의 향배를 모르고 강경 투쟁만을 부르짖[으면] . . . . 독재 기반만을 강화시켜” 준다(1:168). ‘국민과 함께,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 나가십시오.’(2:546)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남기신 정치 참여와 실천의 ‘엄숙한 원칙’입니다.

1971년 5월 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기간 중 의문의 교통사고, 1972년 10월부터 1973년 8월까지 망명 생활과 유신 반대 활동, 1973년 8월 ‘도쿄 납치 살해 미수 사건’, 1976년 3월 ‘3·1 민주 구국 선언’으로 2년 10개월 옥고(獄苦),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한 연행 이후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 1981년 1월 사형 확정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 1982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 후 2년 2개월 동안 망명 생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사면 복권, 그리고 . . . . 1997년 12월 대통령 당선,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 출범.

정치인 김대중의 대한민국 민주화를 향한 긴 투쟁의 역사를, 민주주의자 김대중의 수난사를 어찌 줄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 국민 모두의 투쟁과 고난의 역사는, 고도성장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지만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했던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과 절망은 아직도 다 드러나지 않았고, 아직도 다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민족과 민중의 고난의 역사, 민주주의자 김대중의 수난사는 바로 승리의 역사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향한 투쟁은 마침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루어내었고, 국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난과 승리의 과정에 뿌려진 희생과 고통 모두를 아직도 다 담아내고 충분히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자들이 함께 해야 할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자 김대중이 걸어온 승리의 길에서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두 가지 사실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재야 종교인, 지식인들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1:357). 재야 민주화 운동가들의 ‘순수한 열정’은 정치인 김대중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1:357). 정치인 김대중은 그들로부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용감하고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했다. 그래서 당당했다.”(1:358) 민주화 투쟁의 과정은 한국에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를, 정치인과 시민·사회·민중 운동가들을 굳게 연결시켰습니다. 대한민국은 결코 무너질 수 없는 민주주의의 굳건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목숨을 건 투쟁 과정에서 그리고 뼈를 깎는 고통과 고뇌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신앙을 배웠고 실천했습니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최후 진술은 미래에 대한 예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정신도 배웁니다.

가택연금해제를 위한 시위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 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1:422)

이러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자신 때문에 고통을 당한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또한 인간 김대중은 ‘독재자의 딸’과 화해하면서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1:385)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국민의 정부와 행동하는 양심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는 날,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었습니다. “새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땀과 눈물을 요구해야 하는 현실”에,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 놓고 고통은 모든 국민이 당해야”(2:36) 하는 현실에 대통령께서는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습니다. 너무나 힘든 시작이었습니다.

경제 위기 속에서 대통령께서는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강조했습니다.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독재 정권이어야만 경제를 용이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1:383)는 태도를 오래 전부터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1970년대 초 대중경제론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또 사회주의가 붕괴했을 때에는 “사회주의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지 않은 독재적 사회주의가 패배한 것”(1:578)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인의 말씀을 조금 더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제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나라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다 같이 성공했습니다. 서구 사회의 자본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가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면 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승리하고,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 나라는 몰락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민주주의를 하면 국민들의 비판과 요구가 정부에 전달됩니다. 그리고 그 비판이 정당하게 수용되지 못하고, 요구가 실현되지 않으면 국민은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바꾸어 버립니다. . . . 20세기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독재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의 역사입니다. (1991년 9월 모스크바대학 강연의 요지) (1:579)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철학에 바탕을 두고 경제정책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국민의 정부가 맞부딪친 경제 현실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국민의 정부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옹호하기도 하셨고, 한편으로는 정책의 결과를 안타까워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혹자는 나를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보여준, 철저한 시장 경제 원칙을 강조한 태도에서 그런 비판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997년 IMF 체제 이후 우리의 선택은 시장 경제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생산적 복지’는 시장 경제의 부작용, 폐해를 시정하고 보완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2:341)

나아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인권”이라고, “복지를 통해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셨습니다(2:341). 잊어버리기 전에, 국민의 정부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대통령께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고 확신하셨던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한국 경제의 현실에 대해 깊이 상심하셨습니다.

'국민과의 대화'를 하는 김대중 대통령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는 ‘실업 내각’이라고 할 만큼 실업자 문제 해결에 매달렸지만 중산층 붕괴는 막을 수 없었다. . . . 사회안전망이 허술하여 정부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뒤늦게 많은 실업 대책을 마련했지만 그것이 생계 대책은 될지언정 실직자들을 원상회복시키지는 못했다. . . . 중산층의 붕괴는 소득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빈곤층에 편입된 계층이 다시 중산층으로 올라서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고금리는 부자는 더욱 부자로, 빈자는 더욱 헐벗게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20 대 80 사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 . . 사실 이런 구조는 세계화의 현상에서 이미 시작된, 지구촌 전체의 불가피한 현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 임기 중에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었음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일부 부유층들은 IMF 체제를 즐기고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들의 소비 행태들을 보면서 중산·서민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2:482-3)

세계화 시대에 대외의존도가 심했던 한국 경제의 현실은, 더욱이 외환위기 직후 IMF가 주도한 구조조정 하의 한국 경제의 현실은 이 땅의 민중에게, 민중을 사랑하셨던 김대중 전 대통령께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대통령께서 준비하셨던 대중경제론의 정신은 살아있었지만, 정책의 현실은 냉엄하였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었지만, 한국 경제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이상은 다음 세대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자들이, 민주당이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정치적 화두로, 정책목표로 내세우는 것은 국민의 정부가 다하지 못한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를 말하면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관계의 발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에서 돈 오버도퍼 교수의 평가를 특별히 자서전에서 인용하고 계십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시발점으로 남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한민족 전체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2:311) 고인께서 1970년대 초반에 처음 내어놓은 뒤 1990년대 중반에 완성한 3단계 통일론이 현실에서 빛을 발휘하였습니다. 한민족은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넘어 통일을 향한 평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에 대한 기여뿐만 아니라 동티모르와 미얀마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인권 상황 진전에서 한 역할에 대해 노벨평화상이 주어졌습니다. 노벨위원회는 ‘김대중 씨는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자 김대중이 행동해야 하는 시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주정부 10년이 끝나고 이명박 정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철학이나 비전 없음’을, ‘구체적 내용 없는 정책’을 걱정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을 적으로 아는 정권, 권세만 있고 부자만 위하는 정권”(2:581)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대한민국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전에 바치는 조사에서 김 전 대통령은 3대 위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민주주의 위기, [서민]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지막 연설이 된 2009년 6월 11일 6·15정상회담 9주년 기념사에서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위기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하셨습니다.

남북정상회담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 . .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 간 화해 협력을 이룩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 .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와 서민 경제를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듭시다. (2:594)

4.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

민주주의자 김대중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그의 삶 여기저기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발견합니다.

민주주의만이 자유의 길이요, 경제적 평등의 길이요, 사회 복지의 길입니다.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참여의 정치다. 참여의 정치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치, 백성이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정치, 백성이 스스로 신이 나서 건설하고 나라 지키는 정치, 백성이 그 속에서 발전하는 정치다.

민주주의로부터 자유와 발전이, 인권과 복지가, 평등과 정의가, 화해와 평화가 나옵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공동체 가치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입니다. 민주주의를 참여의 정치로, 사람이 주인이 되는 정치로 정의할 때, 민주주의는 정치적 공동체의 존재 자체, 정치 자체를 의미했습니다. 민주주의 없이는 정치적 공동체도, 정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공동체적 삶 자체입니다.

민주주의자에게 정치와 경제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중민주체제가 실현을 꾀하는 경제체제는 무엇보다도 우선 대중의 이익을 반영하고 대중에 책임을 지는 정치체제의 완성을 전제로 한다.

대중민주체제의 부분 체제라고 할 경제체제와 관련해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민중의 참여를 강조했습니다. 1997년 ????대중경제론????을 ????대중참여경제론????으로 개정·증보하여 발행할 때,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대중경제론≫을 ≪대중참여경제론≫으로 이름을 달리한 것은 무엇보다 경제의 실질적 주체인 대중이 참여하는 경제야말로 참다운 민주적 시장경제이며,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임을 강조한 것이다.

민주주의자 김대중이 갖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민중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민중에 대해, 민중의 참여에 대해 깊은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민중이 가지고 있는 약점과 능력의 한계를 압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방법도 민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참여의 길 이상의 것은 없는 것입니다.

민중의 참여를 믿었기에 국민의 정부는 정보화 사회, 전자 정부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당신의 손안에!(Government in your palm!)’(2:444)라는 전자 정부를 위한 슬로건은 이명박 정부가 불러온 위기의 시대에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로, 광장의 정치로 발현되어 나타났습니다(2:571).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거리의 정치, 광장의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화적인 대중들이 직접민주주의의 중요한 정치 주체가 되었다”(2:572)는 사실로 이해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민주주의와 민중의 의미를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동학혁명의 민중, 3·1 독립운동의 민족, 4월 혁명의 민주, 이 민중·민족·민주의 세 가지가 박정희 씨의 암살 후에 국민의 집중적인 관심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중에 의한 민주 정권을 세우고, 그 민주 정권은 자유와 정의와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면서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촉진한다. 이것을 온 국민의 절실한 기대로서 빌던 그 시기에 전두환 씨가 국민의 모든 의사와 원망에 등을 돌리고 역사적 요구에 역행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항의한 것이 광주 시민입니다. (1983년 6월, ????세카이???? 인터뷰 중에서) (1:466)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정치제도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우리 민족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시대적 가치와 결합되어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

21세기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과 관련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참으로 적절하고 멋들어진 비유를 들었습니다.

한반도는 4대국의 이해가 촘촘히 얽혀 있는, 기회이자 위기의 땅이다. 도랑에 든 소가 되어 휘파람을 불며 양쪽의 풀을 뜯어먹을 것인지, 열강의 쇠창살에 갇혀 그들의 먹이로 전락할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2:597)

그런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결코 민족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고 관용을 베푼 나라가 융성했[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기회와 동기를 부여했고, 그들의 열정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 . . 한국이 앞으로 융성하려면 인종, 문화, 이념의 순혈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2:582)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애를 쓰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안으로 들어와 있는 이민자들,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서도 항상 애를 썼습니다.

민주주의자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깊고 넓게 이해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후미지고 응달진 곳까지 고루고루 퍼져나갈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민주주의 앞에서 어떠한 차별도 경계도 생기지 않도록 우리의 문화를 바꾸어 나가려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깊고 넓게 퍼져나가야만 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우리 민족과 민중의 자유와 발전, 인권, 평화, 통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으로, 세계 평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더 깊고 더 넓게 실현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자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동시에 가져야 하며,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 가야 합니다’(2:547).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맙니다.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 가기 위해서는 시대에 앞서서 훨씬 멀리 내다보아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대중경제론과 3단계 통일론을 이미 1970년대에 구상하시고 내어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상인적 현실감각’만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먼 미래를 구상하는 ‘서생적 문제의식’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오늘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2주기를 맞아 그의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다”(????김대중 자서전????, 2권 6부 4장)는 말씀으로 고인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 위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고인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남기신 아름다운 시를 읽으면서, 고인과 참석하신 모든 분께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나는 많이 흘러왔으니 곧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한반도 남쪽 바다 조그만 섬에서 태어나 지구촌을 떠돌았다. 온갖 무늬의 시간들이 주어졌지만, 위대한 신은 내게 용기와 지혜를 내려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일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을 내려 주셨다. (2: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