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연구원

내용 바로가기

퇴행하는 민주주의, 추락하는 인권

퇴행하는 민주주의, 추락하는 인권


유남영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변호사)


 


“한국 쥐에게 자유를!” 영국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의 팬 사이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명운동의 슬로건이다. 우리나라의 한 대학강사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 현재 이 대학 강사에 대하여 공용물을 훼손하였다는 명목으로 형사재판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 구호는 이러한 사정에 대한 항의이다. 이 대학 강사는 이 재판을 두고 “유머 대 공포”의 전쟁이라고 평한다. “한국 쥐”에 대한 형사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한 마디로 평가하면, 편집자가 필자에게 제시한 이 글의 제목 그대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세력이 자신의 주의와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래서 통상 정치적 자유주의가 확립된 이후에야 민주주의가 꽃핀다. 자유의 공간이 제한되면 선거제도가 작동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거나 퇴행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와 인권이 서로 의존하고 보강하는 관계에 있음은 1993년 비엔나 선언(the Vienna Declaration)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래 현재의 시점까지 우리 사회의 내부에는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자유의 공간의 확보와 범위를 둘러싸고 격렬한 헌법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자유의 공간이 확보되는지의 여부는 헌법상의 기본적 인권 가운데에서도 특히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표현의 자유의 보장과 그 범위에 달려 있다. 이명박 정부 3년 동안 이러한 자유의 공간은 소위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축소되고 있다. 이 글은 표현의 자유 등에 대한 제한과 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소위 “법치”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역사적 지체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이명박 정부 3년 동안 우리의 인권, 그 가운데에서도 표현의 자유의 후퇴는 현저하다. 표현의 자유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고립된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전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쳐 시민들로 하여금 표현을 하지 않도록 하는 소위 냉각효과(cooling effect)이다. 그 결과 시민들은 표현행위를 할 때 스스로 제한을 하는 자기검열을 하거나 인터넷 공간에서 사이버망명을 한다. 그러므로 표현의 자유의 후퇴는 곧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하는 자유의 공간을 축소시켜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추락을 초래한다. 이에 관하여 국제적인 기관 및 인권단체의 평가를 보자(각 한겨레신문 관련기사 참조).


먼저 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UN Special Rapporteur)은 2011년 5월 31일 제17차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우리나라에 대한 보고에서 우리나라에서 표현의 자유가 심대하게 제약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즉 명예훼손과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 선거전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국가안보를 이유로 하는 표현의 자유, 공무원의 표현의 자유, 언론매체의 독립성 등의 영역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은 사적인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북한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과 동일하게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선임한 공식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그 보고서는 유엔의 공식문서로 접수, 활용된다. 유엔 특별보고관의 이러한 평가는 국제적인 인권단체(INGO)의 보고에 의하여도 지지된다.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 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2011년도 연례보고서에서 “한국 정부가 모호한 법조항을 담은 국가보안법과 명예훼손 관련 법률을 이용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탄압하고 억누르는 사례가 늘어났다”고 보고하였다. 관계자는 “지난해 천안함·연평도 사태가 표현·사상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공포정치를 낳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나아가 미국의 보수적 인권단체인 프리덤 하우스는 2011년 세계 언론자유도 조사 결과에서 우리나라를 196개국 중 70위로 기록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까지 그나마 “자유국가”의 끄트머리에라도 붙어 있던 지위를 상실하고 “부분 자유국가”로 강등됐다. 이 순위는 중남미 카리브해의 자메이카(23위), 아프리카의 가나(54위)는 물론 이웃의 대만(48위)보다도 한참 아래다. 이들 두 단체는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하여도 엄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 두 단체의 보고에 따르면, 지난 3년간 한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 구성원 전체의 삶의 질이 악화된 셈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표현의 자유의 후퇴에 관하여 많은 논란과 지적이 있었다. 촛불집회, MBC PD 수첩 사건, 미네르바 사건, 공직선거법의 과도한 적용, 국가(국가정보원)의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손해배상, 천안함 사건, 국가보안법 사건, 교사 등의 시국선언 등에 관한 논란, 국방부의 불온서적 시정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집권세력은 표현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제한은 적법하다고 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우리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좌파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해왔다. 이러한 국내에서의 비판에 대한 경우와 달리 현 집권세력은 차마 국제적인 기관 및 단체들의 위와 같은 비판을 좌파 이데올로기로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외부시각에 대하여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각 나라마다 법제의 차이(소위 상대주의)가 있다거나 관련 자료가 제대로 제공되지 아니하거나 설명이 부족하여 오해가 생겼다는 투의 변명을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투의 변명은 현 집권세력이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북한을 비롯한 인권후진국이 국제사회의 인권문제 제기에 대하여 방어를 하면서 내세우는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수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반응을 보면, 현 집권세력은 우리 사회는 인권이 잘 보장되어 있다는 자만심의 단계를 지나서 인권을 경시 내지 무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징표로 이명박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우리 사회의 인권에 관하여 언급한 빈도수를 들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인권에 대하여 얼마나 언급하느냐 하는 것이 집권세력의 중요한 인권지수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언급의 빈도수는 대통령이 국가를 운영하면서 고려하는 여러 가지 계기판에 과연 인권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을 한 이후 우리나라의 인권문제에 관하여 공식석상에서 언급을 한 것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필자가 알기로는 2010년 4월경 서울 양천경찰서 고문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국무회의에서 인권을 언급한 것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한 명의 피의자가 밀실에서 수명의 경찰관들에 의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살벌한 고문을 당할 정도가 되어야 인권문제가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현재 집권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그 동안의 민주화의 성과로 호전된 우리 사회의 인권상황에 대한 과대한 자만심이 아니라 현 집권세력이 북한의 인권문제에 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외부적인 거울인 인권의 국제기준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태도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자유의 공간이 축소되는 데에 소위 “법치”의 주장이 동원되고 있다. 우리 헌법은 인간의 권리는 국가에 앞서며 국가는 이러한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존재함을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관에 따라 정치적 기본원리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함과 아울러 국가권력이 행사되는 절차와 내용에 관하여 법치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여기에서 법치주의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권력과 그 행위자의 권력행사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치주의의 핵심은 법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지배(rule by law)가 아니라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법을 통한 지배(rule of law)에 있다. 이러한 법치주의의 실현은 1987년 이후의 민주화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법치주의를 적용받을 대상은 일반 국민 내지 시민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그 권력을 행사는 공무원이다. 그런 까닭에 법치주의는 국민이 국가권력에 요구하는 것이지 국가권력이 국민에게 훈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집권세력에 주장하는 “법치”는 그 대상이 권력이 아니라 일반국민 내지 시민이 된 거꾸로 선 법치주의이다.


현 집권세력이 주장하는 “법치”의 이러한 특징은 이명박 정부 3년 동안 사회적으로 이목을 끈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 결과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YMCA 눕자행동단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 미네르바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 MBC PD 수첩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의 기각과 형사사건에 대한 무죄판결, 시국선언에 참여하거나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들에 대한 해임처분이 무효임을 확인한 판결, KBS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처분의 무효 및 형사기소에 대한 무죄판결,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에 대한 형사기소에 대한 무죄판결, 국가정보원의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의 기각, 소위 한 지붕 두 위원장의 사태를 야기한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해임처분의 무효를 확인한 판결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예는 현 집권
세력이 주장하는 “법치”가 속성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법원에 의하여도 거부되었음을 나타낸다. 여기에 양천경찰서 고문사건과 정보기관(국무총리실, 국가정보원 등)의 정치인을 포함한 민간인에 대한 사찰 사건을 더하면, 현 집권세력이 주장하는 “법치”의 현 주소가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 주장하는 공안의 논리와 흡사함을 잘 알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인권의 제한과 거꾸로 선 법치주의는 민주주의가 작동할 자유 및 그에 기초한 정치의 부드러운 공간을 축소시켜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대신 그 자리를 물리력을 동반한 딱딱한 법집행으로 채워나간다. 이는 결국 국가권력이 시민사회에 군림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필자는 지난 17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인 2007년 12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도 자유권은 일정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으므로 앞으로는 사회권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사회권이란 개인이 자유권에 따른 선택을 추구할 수 있도록 사회적, 경제적인 조건을 구비할 것을 국가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무렵에 근대적인 자유권을 실질화하는 현대적인 사회권을 떠올린 까닭은 어느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든지 간에 우리 사회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지난 3년을 돌이켜 보면, 필자의 이러한 판단은 너무나도 순진한 책상물림의 생각이었다. 불가의 용어로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확실하다고 믿고 서 있는 발밑이 과연 안전한지 살피고 경계하라는 이야기다. 눈앞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데 발밑이 푹 꺼지는 경험을 한 이가 필자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그것은 우리의 지난 역사와 분단상황을 생각해보면 자명한 사실인데 이를 경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1987년 이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경제, 언론, 교육, 종교, 법조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역이 특정소수세력에 의하여 장악되고 있어 사회적·경제적 불평
등을 유지·확산하는 과두체제로 지배되고 있다. 다만 그 동안의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짐으로써 개혁·진보세력이 국가권력의 상층영역과 의회에 다수파로 참여할 수는 있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정치권력이 특정소수세력을 대표하는 현 집권세력으로 넘어가자 그 동안 정치권력에 의하여 통제되고 좌절된 이들의 욕구와 이해가 거침없이 분출된 결과 개혁세력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믿었던 영역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얄궂게도 개혁·진보세력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으로 인하여 우리사회의 진면목을 구체적으로 각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야권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보편적 복지국가”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점은 환영할 일이다. 우리의 헌법은 경제조항을 비롯한 여러 조항에서 국가에 대하여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제거하여 국민이 인간다운 최저한도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구비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소위 사회권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이 시장경제에 개입하여 개인이 최소한도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경제적인 조건을 구비하기 위한 정치적 합의를 창출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권은 자본주의사회의 불평등을 제거하여 1달러 1표를 방지하고 실질적으로 1인 1표가 행사되도록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헌법체계를 논자에 따라 독일헌법학의 용례에 따라 “사회국가원리,” “사회적 법치국가,” “사회적 시장경제주의” 등으로 명명하고 있다. 헌법 개정이 논의될 때마다 이러한 조항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인사들은 항상 소위 헌법 제119조를 비롯한 경제헌법에 관한 조항을 폐지하자는 견해를 항상 제기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보편적 복지국가”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헌법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화 작업으로서 우리 사회의 헌법투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인권이란 자유권과 사회권을 포함하여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서로 연결되고 의존되어 전체로서 보편적인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 이러한 논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새롭고 한 차원 높은 선택과 수단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의는 민주당이 현재 주장한 바와 같은 몇 가지 정책의 조합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우리 헌법의 정신에 맞게 사회권을 충실하게 실현하는 포괄적인 국가운영원리 및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으로 발전하여야 한다. 그 결과 이러한 논의가 우리 헌법의 핵심인 인권과 민주주의를 고양시키고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과 차별 및 배제를 제거할 수 있는 도화선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