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28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으로 본 ‘윤석열 추종 현상’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28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으로 본 ‘윤석열 추종 현상’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28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으로 본 ‘윤석열 추종 현상’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가 열리는 경주가 꽤 소란스럽다. 윤석열 [전]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윤석열을 지켜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일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윤 [전]대통령을 도울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트럼프가 곧 한국을 구한다”는 피켓과 “윤석열은 정의의 상징”이라는 문구가 등장한 이 장면은 정치적 지지의 차원을 넘어선 집단적 광기의 양상이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맹목적 지지’로만 해석하기에는 그 심리적 기반이 복잡하고 깊다. 왜 어떤 이들은 특정 정치인을 신화화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그 인물의 존재와 동일시하게 되는가?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가 제시한 ‘욕망의 삼각형’ 이론은 이에 꽤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한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모방 욕망(mimetic desire)’이라 명명하고, 욕망의 구조를 ‘주체(나)–대상–중재자(모델)’로 이루어진 ‘욕망의 삼각형’으로 설명했다. 인간은 스스로 욕망을 창출하기보다는 모델이 욕망하는 대상을 따라 욕망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특정 정치 지도자에 대한 추종 현상을 해석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그들은 윤석열이 욕망한다고 믿는 것—힘, 국가, 법치, 적폐 청산—을 대신 욕망함으로써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는 본인의 내면에서 비롯된 욕망이라기보다는 윤 대통령이 지향한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특정 모델을 통해 전이한 ‘대리 욕망’일 뿐이다.
문제는 모방 욕망이 필연적으로 좌절을 낳는다는 점이다. 모델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좌절한 욕망은 곧 외부의 적으로 향한다. ‘좌파’, ‘종북’, ‘적폐’, ‘반국가 세력’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투사할 대상을 찾는다. 여기서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 메커니즘(Scapegoat Mechanism)”이 작동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집단은 불안한 욕망의 구조를 봉합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옳고, 저들은 틀렸다”는 단순한 도식 속에서 불안은 안정으로, 무력감은 우월감으로 바뀐다.
윤석열 추종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구원자’로 호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윤석열이 욕망의 모델이라면 트럼프는 그 모델의 상위 모델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욕망의 구조는 “트럼프 → 윤석열 → 우리”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사슬로 확장된다. 이 사슬 속에서 지지자들은 자신을 국제적 반좌파 연대의 일원이라는 상징적 정체성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정치적 지지는 점차 종교적 신념의 형태를 띠고, 정치인은 구세주의 이미지로 재구성된다.
지라르는 이런 모방 욕망의 종착점을 ‘폭력의 순환’이라고 했다. 모델을 따라잡으려는 모방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결국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검찰권을 절대화하고, 사법부를 공격하며, 언론을 적으로 규정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모델을 대신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석열을 향한 충성은 곧 ‘윤석열의 적’을 향한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진다.
문제는 그들의 욕망이 자립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윤석열이 사라지면 그들의 욕망도 방향을 잃는다. 지라르가 지적했듯, “인간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할 뿐”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모방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인간은 주체성을 잃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사회는 전체주의의 문턱을 넘어버린다.
진정한 시민은 ‘모방의 주체’가 아니라 ‘비판의 주체’여야 한다. 진실한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베끼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성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욕망의 삼각형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는 결국 자신이 만든 ‘신’을 스스로 ‘희생양’으로 삼는다. 윤석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신화가 그 마지막 희생양이 될지, 아니면 우리 모두가 욕망의 사슬을 끊고 주체로 서게 될지는 지금 이 순간의 성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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