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절망의 끝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다
- 기성 세대에게 고하는 '한심하고 갑갑한' 20대의 항변 -
한심하고 갑갑한 존재, 우리는 20대
“요즘 20대들을 보면 마음이 갑갑해질 때가 많아요. 너무 스펙 쌓기와 취업준비에 열중하다보니 사회에 대해 무관심하단 말이죠. 우리가 대학생일 때는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사회를 바꿨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를 좋게 만들려는 의지도 없고, 지성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민주시민교육가로서 시민사회진영에서 활동 중인 한 분과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분은 필자가 20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부탁하자 작심한 듯이 위와 같이 말을 꺼냈다. 그 분에게 있어서 현재의 20대들은 과거 민주화운동 선배들의 사회의식을 본받지 않는 ‘갑갑한’ 존재였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을 생각도 못한 채 오로지 취업만 생각하는 ‘한심한’ 존재이기도 했다.
사실 조금 못마땅했다. 속에서 질문을 가장한 반론들이 마구 떠올랐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 분이 필자를 ‘갑갑하고 한심한 존재’로 몰락시키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반문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북한에 의해 자식의 목숨을 잃은 유족의 입장에서 햇볕정책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모두 ‘빨갱이’가 될 수밖에 없듯이, 민주화의 성과를 몸소 일구어 낸 학생운동가의 입장에서 탈정치화된 20대의 모습은 모두 갑갑하고 한심한 후배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심하고 갑갑하던 20대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전례 없이 높은 투표율을 보이며 야권의 승리에 일조하더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박원순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박원순 후보의 경우 20대로부터 무려 70%에 달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20대는 정부여당에 대한 반대의사를 투표행위를 통해 명확히 전달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기성정치를 싫어한다
사실 20대는 그동안 기성세대들로부터 정치에 관심이 없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다. 우선 쿨하게 인정하겠다. 우리 20대는 여전히 기성세대 방식의 정치를 싫어한다. 선거유세기간에만 반짝하고 찾아와서 웃는 낯으로 악수하다가도, 선거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를 외면하는 그들에게 무슨 기대를 한단 말인가? 심지어 대통령도 ‘반값 등록금’ 공약을 내 걸었던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거늘.
우리 20대에게 있어서 여전히 가장 큰 걱정거리는 취업이다. 넉넉한 보수에 안정적인 지위가 보장되는 좋은 직장 말이다. 그런데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학창시절에 입시전쟁에 몰두해야 한다. 입시전쟁의 결과에 따라 SKY, 인서울,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 지잡대(지방의 유명하지 않은 사립대를 비하하는 조어), 고졸로 승패우열을 나누고, 각자의 ‘분수’에 맞는 삶을 설계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대학 입학 후 본격적인 취업전쟁이 시작된다. 남들보다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토익 900점 이상은 필수조건이고, 제 2외국어와 교환학생 경력, 공모전에서의 수상은 취직에 도움이 되기에 널리 권장되는 ‘덕목’이다. 치열한 준비과정을 통해 졸업 후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고시출신 5급 공무원과 7~9급 공무원, 전문직과 비전문직, 정규직과 비정규직. 우리는 이렇게 나뉘고, 또 평가받는다.
IMF의 악몽 - 신자유주의적 생존방식을 본능적으로 체득한 20대
언제부터 이러한 가치가 우리세대를 점령했는가? 1997년 겨울로 잠시 시계바늘을 돌려보겠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금융위기 앞에서 많은 평범한 가정들이 순식간에 몰락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런데 IMF가 갖고 온 것은 비단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뭉칫돈뿐이 아니었다. IMF는 신자유주의라는, 현재 한국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새로운 지배적 가치를 전파하였다.
금융위기 이후 변화한 경제 시스템 하에서 ‘생존’과 ‘약육강식’의 가치가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더 이상 정년을 보장해 주는 직장은 없었다. 모든 아버지들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쳤으나, 그들 중 상당수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빈털터리가 됐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한 희생은 99%의 임금노동자의 몫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20대는 그런 아버지들 밑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신자유주의적 가치담론을 일상적으로, 교육적으로 내면화 한 첫 세대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협동보다는 경쟁의 가치를 먼저 배우고, 공생보다는 지배의 가치를 먼저 배우고, 정신보다는 물질의 가치를 먼저 배우면서 자라났다. 이 과정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생존원리를 환경적으로 체득했다. 20대가 높은 보수와 안정적인 미래가 담보된 직장을 원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임금노동자로서 나름대로 안락한 가정을 꾸리며 살다가 순식간에 직장에서 쫓겨나는 자신들의 아버지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슈퍼맨을 요구하는 사회, 그 끝에서 절망을 체험하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저자 엄기호씨는 세상이 20대에게 기대하는 바를 이렇게 요약했다. “세상은 20대들에게 슈퍼맨이 되라고 한다. 성적은 당연히 좋아야 하지만 성적에만 목을 매서도 안 된다. 성격과 사회성이 좋아야 하지만 정에 매여서도 안 되고 철저히 경쟁적인 약육강식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제도에 충실하면서 자기 경험도 많아야 한다. 한마디로 슈퍼맨이 되거나 죽으라는 이야기다.”
마치 프로야구에서 한 사람에게 타자로서 4할을 치면서 동시에 투수로서 0점대의 방어율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도전해야 한다. 안 그러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배워왔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불가능을 요구하는 사회에 불만을 제기할 경우, 능력을 키울 생각은 안한 채 사회 탓만 하는 철없는 젊은이가 되어 버린다.
이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많은 이들이 절망을 체험했다. 절망이 극단적으로 표출될 경우 자살로 이어졌다.(우리나라는 현재도 20대의 자살률이 OECD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자살할 용기가 없는 대부분의 20대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명운’을 감수하고 구조적 패배자의 위치에 순응했다. 순응을 할 때는 사회와 한 가지 서약을 해야 한다. “제가 패배한 이유는 모
두 제 노력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슈퍼맨’ 이명박 대통령, 절망을 분노로 바꾸다
그런데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능력자가 등장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지난 대선에서 많은 20대가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거나 혹은 투표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당선에 간접적으로 일조했다. 대기업의 일개 사원으로 시작해서 경영자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그의 슈퍼맨적 성공스토리에 많은 20대들이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었다. 후보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등록금을 반값으로 줄이겠다고 했고, 일자리를 300만개 만들어 청년실업을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등록금은 더욱 올라가고, 취업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대를 대하는 현 정권의 태도는 우리를 분노하게 했다. 정치적 의사표출에 대한 진압은 가히 ‘슈퍼맨적’이었다. 2008년 촛불집회는 절망을 분노로 바꾸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다수의 20대가 공감하고 참여했던 촛불집회에 현 정권은 물대포와 명박산성으로 맞섰다. 20대가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인터넷에서는 논객 미네르바가 구속되는 등 언론장악의 시도가 이어졌다. 20대를 위한 정책은 국회와 정부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20대의 분노에 둔감했다. 20대는 정치적 무관심이 철저히 내면화된 세대일뿐더러, 각종 선거에서 투표결과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투표참여율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대의 절망을 현 정권이 무시하자 분노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의 의사표현은 미네르바 사건과 같은 정권의 강경한 진압태도 때문에 심리적으로 꺼려지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대는 다시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절망에 대한 분노의 표출, 이 결과가 작년 지방선거 때부터 20대의 높은 투표율, 그리고 야권세력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 가짜 슈퍼맨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난 20대가 정치로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20대의 귀환을 이끄는 세 가지 동인
20대가 정치로 귀환하고 있는 것은 당분간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시키는 동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20대의 현실을 공감한 일부 기성세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99%의 20대에게 “그건 너희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20대에 대한 책망과 비판의 언어가 힘을 잃고 위로와 사과의 언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우리를 위로하고, 경쟁도태적인 사회구조를 만든 것은 자신들이라며 우리에게 사과한다. 사회정점에 서 있지만 낮은 위치로 내려와서 함께 공감하는 안철수 원장의 행보에 많은 20대가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가 사회에서 내는 목소리, 취하는 행동에 주목하며 자신들의 사고와 행동의 길잡이로 택한다.
둘째, 정치가 ‘졸라게’ 웃겨졌다. 우리가 처음 ‘나는 꼼수다’를 들었을 때, 적어도 주변 남자들끼리의 첫 반응은 대체적으로 이렇다. “야 졸라 웃겨!!” 김어준과 ‘나꼼수’ 멤버들은 유쾌한 언어로 우리에게 웃음을 준다. 분명 그들이 다루는 소재자체는 고리타분한 정치임에도 불구하고, 듣다보면 어느새 실실 쪼개면서 방송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웃음을 넘어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쫄지마 **!” 많은 20대들이 대통령을 ‘가카’라고 지칭하면서 풍자와 비판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셋째, 인터넷에서의 ‘잉여질’은 20대의 취미이자 특기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혼자 있는 젊은이들의 대체적인 행태를 관찰해 보면 알 것이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거나 MP3를 듣고 있을 것이다. 밖에서 이동 중에도 이럴진대 하물며 집에 있을 때는 오죽할까. 때문에 20대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절대강자이다. 20대는 잉여 시간을 인터넷에서의 소통에 투자하면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새로운 소식, 의견 등을 교환한다.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 : 공감과 즐거움의 정치
20대가 바라보는 정치는 기성세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첫 번째, 20대는 정치적 행위 그 자체보다 행위의 진정성을 판단하여 움직인다. 때문에 20대에게는 정치적 ‘쇼’가 먹히지 않는다. 민주당 의원들이 FTA를 막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카메라 앞에서 단체로 절을 하는 모습을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대통령이 아무리 라디오 정기연설에서 ‘G20 정상회의’를 통해 우리의 국격이 한층 높아졌다고 홍보해도 많은 20대들이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 이도의 말을 빌려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하고 자빠졌네.”
두 번째 다른 점, 20대에게 정치는 도덕적 영역이 아니라 유희적 영역이다. 오랜 기간 동안 정치는 도덕의 영역이었다. 정치적 대의는 항상 옳은 것, 선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 개인의 기본적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고, 동시에 사회는 공동선을 이루어야 한다. 막스 베버가 말했다시피, 이를 위해서 정치가는 대의로서의 선을 추구하는 신념윤리와 현실에서의 책임을 감수하는 책임윤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20대에게 이러한 복잡한 도덕적 논리는 먹히지 않는다. 이미 가장 ‘도둑적’인 자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을 꾸려가는 마당에, 정치에서 무슨 도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20대는 정치를 놀이의 영역으로 바라본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0월 26일,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투표 인증샷 놀이가 한창이었다. 트위터에서는 유명 연예인의 투표 인증샷과 투표율 관련 내기공약이 리트윗되었고, 페이스북에서는 친구들의 투표 인증샷이 활발하게 공유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20대에게서 주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정치참여방식, 바로 놀이로서의 정치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이다.
투표행위 : 놀이에서 게임으로
정치가 놀이의 영역에 포섭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직접 이 게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게임은 승부가 존재하는 놀이이다. 때문에 게임에 참여한 이상 나는 이겨야 한다. 따라서 투표행위는 선거라는 게임에서의 승리를 위한 필수 아이템이다. 마치 학창시절에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를 하기 위해 PC방을 찾고, 위닝일레븐을 하기 위해 플스방을 찾았듯이, 지금의 20대는 투표라는 게임을 하기 위해 투표장을 찾는다.
게임에서의 짜릿한 승리 뒤에는 기쁨이 따른다. ‘아름다운 재단’의 한 변호사가 ‘아름다운 피부’를 가진 한 정치인을 이기는 모습에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친구에게 GG(패배를 인정한다는 의미의 게임용어)를 받아낸 것 같은 통쾌함을 느낀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느끼는 ‘승리의 경험’이다. 승리의 짜릿함을 맛본 게이머는 계속 그러한 짜릿함을 느끼기 위해 게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설사 패배를 맛보았어도 승부욕이 강한 일부 20대들은 승리를 위해 계속 게임에 참여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학창시절에 ‘자발적으로’ 학원 대신 엄마 몰래 PC방을 갔던 것처럼 말이다.
게임이 질리면 유저들은 떠난다
그러나 동일한 포맷의 게임은 언젠가 질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게임회사들은 게임유저를 계속 붙잡아 두기 위하여 새로운 아이템을 내놓고,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새로운 스테이지를 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속적인 개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게임은 점차 유저들의 관심을 잃는다. 게임에 질린 유저들은 그 게임판을 떠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20대가 투표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유는 투표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투표를 통해 승리의 쾌감을 맛보았기 때문에 재밌고, 자신이 변화에 일조했다는 기분에 다시 한 번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재미가 떨어지면 20대들은 다시 투표장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20대의 무관심은 다시금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야권에 치명타를 안길 것이다. 최근 선거에서 그들이 보내주고 있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 정치권은 20대가 계속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 서비스의 핵심은 20대가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삶의 변화이다. 등록금을 낮추고, 고용불안을 해소하며, 연애와 결혼 부담을 덜어주는 실질적인 정책 말이다. 최근 35세 이하 청년층 4명에게 ‘슈퍼스타 K’ 방식으로 비례대표를 주겠다는 방안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어찌됐든 이 경우 청년‘세대’를 대변하기 위한 임무를 띤 4명의 정치인이 탄생한다. 이들이 정치적 출세를 위해 요식행위의 희생양을 자처하고 나온 기성정치의 꼭두각시들인지, 20대 유저들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진정한 서비스를 제공할 매니저들인지,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맺음말 : 기성세대에게 고하는 ‘한심하고 갑갑한’ 20대의 항변
20대의 정치로의 귀환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계속해서 서두에 언급했던 시민정치교육가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포함한 ‘민주화시대의 청춘’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한심하고 갑갑한 세대가 아니라고. 마지막은 필자가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끝맺으려 한다. 그들의 희생에 대한 존경을 담은 편지임과 동시에 소심한 항변의 글이기도 하다.
우리는 선배님들을 존경합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선배님들의 용기와 희생 덕에 정착되었습니다. 어떤 선배님은 교정 앞 은행나무 앞에서 할복을 했고, 어떤 선배님은 시위 중 최루탄을 맞아서 그대로 즉사했습니다. 또 어떤 선배님은 잔인하게 고문당한 후유증 때문에 지금 병실에 누워 계십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당신들의 피눈물을 머금고 자랐습니다. 선배님들은 우리에게 당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 문제의 해결을 주도하는 지성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선배님들은 우리에게 슈퍼맨이 되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낼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신들이 자라면서 겪었던 그것과는 다른 경험, 다른 사고방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선배님들이 만든 판에서 당신들의 요구대로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판이 더 이상 우리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판이 아님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 판을 깨기 위해, 아니 우리 입맛에 맞는 판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들이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방식은 당신들이 체험하고 기대하던 방식과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집회나 시위 대신에 멘토들이 개최하는 청춘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신문의 시사란이나 방송의 시사프로그램과 같은 고리타분한 것 보다는 ‘나는꼼수다’를 다운로드해서 듣는 게 훨씬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오프라인 토론회에 참석하는 것 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잡담속의 토론을 훨씬 즐깁니다. 그러나 끝까지 지켜 볼 것입니다. 접근하는 방식은 비록 다를지언정, 선배님들의 정치가 우리가 바라는 정치와 잇닿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다음 세대에게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한 책무를 잊지 않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당신들이 실정을 거듭하면, 우리는 투표의 결과로 답할 것입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투표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 싶으면 그 때에는 거리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반값 등록금 집회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고 외치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써 평화적인 봉기를 제시했습니다. ‘나는꼼수다’를 다운로드하고, 청춘 콘서트에 참여하고, 트위터의 투표독려메시지를 리트윗하고, 페이스북 친구의 투표 인증샷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 우리는 이렇게 조용히, 즐겁게, 하지만 평화적으로 봉기하고 있습니다. 선배님들, 내년 4월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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