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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한민국' 인가? - 국호 ‘대한민국’의 의미와 유래 -

배경

왜 '대한민국' 인가?
- 국호 ‘대한민국’의 의미와 유래 -

배경

 대한민국! 그 이름을 가슴에 품은 지 100년, 우리는 수많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빛내 왔다. 지난 100년은 이제 우리의 미래, 새로운 100년, 모두가 함께 잘 사는 포용국가를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100년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國號)와 함께 시작되었다. 한 나라의 국호는 그 나라의 역사적 정통성과 지향을 담고 있다. 국호의 역사와 의미로부터 국민들은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다.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가 중요한 이유다. 국호 ‘대한민국’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담은 역사의 응집체다. 우리나라의 이름은 왜 대한민국일까? 국호 대한민국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우리 선조들이 국호 대한민국에 담고 싶었던 정신은 무엇일까? 국호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이해하는 시작이다. 

이 글은 국호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역사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대한(大韓)’ 은 고대의 삼한에서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진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해 국가통합을 이루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민국(民國)은 ‘우리 겨레가 일찍부터 추구해 온 신분차별 없고 백성이 주인인 나라,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국가’의 지향을 표현한다. 이 두 의미가 합해진 대한민국은 ‘대통합 된 한민족의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국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국호 대한민국은 대한제국,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치면서 광복과 함께 우리의 국호로 정착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호와 관련된 많은 논란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논란 과정에서도  제헌국회가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한 궁극적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썼던 국호로서 일제의 대한말살책동에 대항한 항일의식과 광복의 의미가 담겨 있고, 둘째, 1919년 3·1혁명의 결과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애착과 함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셋째, 국민통합과 국가통합의 정치적 지향과 ‘대통합된 한민족의 국민국가’건설의 의지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제헌국회가 국호를 정하던 과정에는 많은 논란들이 있었다. 당시 제헌국회 의장이던 이승만이 “적절한 시기에 국호문제를 다시 논의해보자”고 제안을 함으로서 논란은 일단락되었고, 국호 대한민국은 정해졌다. 그 적절한 시기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우리 국호 대한민국의 의미와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알고 역사적 자긍심을 갖는 것이 우선이다. 

 

  국호의 의의  

 

 ❍ 역사적 정통성  

  - 국호는 한 국가를 호명하는 단순한 이름을 넘어 

  - 국가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담아 역사계승의식을 나타내고 

  - 국가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고 강화  

 ❍ 국가의 정체성 

  - 국가의 이념과 사상, 체제 등을 담아  

  - 국가의 정치적 지향과 의무를 표현함으로써 

  - 국가의 자주성을 드러내고 국민의 통합을 이루는 중요한 기능  

 

  “대한”의 유래와 의미   

 

 ❍ 민족사의 계승과 국민통합의 정신 

  - 대한(大韓)은 상고시대부터 우리 민족공동체를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이었던 ‘한(韓)’에 ‘대’자를 붙인 명칭으로 고대 역사로부터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정통성을 지님 

  - 고대의 마한, 변한, 진한을 가리켜 ‘삼한(三韓)’이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을 삼한이라 통칭 

  - 통일신라 이래로 삼국 전체를 묶어 우리나라로 여기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통일의식이 존재했으며 특히 태조 왕건은 고려의 건국을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통지업(一統之業) 으로 여김 1) 

  - 삼한은 우리의 자의식으로 더욱 고착화되어, 우리 역사의 전단계가 ‘삼한’이며  우리나라, 우리 국토가 삼한이라는 인식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옴 2) 

  - 중국과 일본 등에서도 우리나라를 오래 전부터 삼한, 한, 한국으로 부르는 등 보편성을 지님

 

 ❍ 고종이 국호를 대한으로 변경한 이유 

  -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통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統一爲一), 지금 천하의 이름을 ‘대한’이라고 정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일찍이 각국의 문자를 볼 때마다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고 했으니, 이는 아마 미리 징험을 보이고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천하에 성명하기를 기다릴것도 없이 천하는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다.” 

  -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 이후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三韓)’을 통합했다.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북쪽으로는 말갈, 남쪽으로는 탐라국을 차지했다.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 ….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고종실록 36권)

 

 

 

 

3)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을 한국으로 축약해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음. 이충우, 「국호 ‘대한민국」, 『인문학연구』, 2001 



❍ 순종 칙령(318호) 

  - “한국의 국호를 고쳐 지금부터 조선이라 칭한다.” 

❍ 일본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총독부 시무식 훈시  

  - “이 땅의 판도는 오늘부터 대한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 부른다. 한성은 경성이라 한다. 저들보다 조선보다 대한제국에 미련이 남아 있고, 경성보다 한성에 연연하며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라기보다 한민족이기를 원하지만 나를 믿고 지시대로 봉공하라.”5)


- 일제가 대한을 말살하고 조선을 선택한 이유는 조선이 기자조선 이래 중국의 제후국명이 라는 데 주목해 조선을 독립국이 아니라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한민족의 타율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는 설도 있음 6) 
 - 일제의 ‘대한’, ‘한’말살 정책으로 인해 모든 신문, 공식문건, 기관명 등에 ‘한’이라는 말은 사용금지 되고 모든 활자매체에서 한이라는 이름은 사라짐 
   ❇ 대한매일신보 → 매일신보, 대한신문 → 매일신보, 대한신문 → 한양신문 7) 
 -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 맞서 대한의 국호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자주독립정신과 배일정신의 표출 
 - 3·1독립선언서에도 조선이라는 명칭이 사용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광폭했던 ‘대한’말살책 동에도 불구하고 3·1혁명 당시 수많은 국민들은 백주대낮에 ‘대한’이라는 국호를 전면에 내세워 ‘대한독립만세’를 외침 
 - 3·1혁명 이후 독립운동세력들은 ‘대한’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걸었으며 많은 단체와 언론들이 대한, 한 등의 이름을 걸고 활동함 
   ❇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단, 대한독립청년단, 대한독립군, 대한의민단, 대한국민단, 대한신민단, 한국국민당, 한인애국당 등

❍ 대한독립선언서(1919.2) 

  - “우리 대한은 예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며 이민족의 한(韓)이 아니다. 반만년 역사의 내치와 외교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한 권한이요 백만방리(百萬方里)의 높은 산과 아름다운 물은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 재산이다. 기골과 문언이 아시아와 유럽에서 빼어나고 순수한 우리 민족은 능히 자신의 나라를 옹호하며 만방과 화협하여 세계와 함께 나아갈 민족이다. 한(韓) 일부의 권리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뜻이 없으며 한(韓) 일척의 땅이라도 이민족이 점할 권한이 없으며 한(韓)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韓)은 완전한한인의 한(韓)이 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8)

 

 

4) 박광용, 「우리나라 이름에 담긴 역사계승의식 –한·조선·고려관」. 『역사비평』, 1993, 19쪽 

5) 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황해문화』, 2008, 60쪽 

6) 강창일, 「일본에서는 한,조선,고려가 어떻게 사용되었나」, 『역사비평』, 64쪽: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역사적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7) 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황해문화』, 2008, 60-61쪽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있은 첫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 

 - 국호를 ‘대한’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중장년층과 청년층, 민족세력과 좌익세력 간의 주장이 대립하였으나 대한제국의 계승과 혁신의 입장에서 ‘대한’으로 정함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호제정과정 

  - 1919년 4월 10일 열린 첫 의정원 회의에서 신석우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 

  - 이에 대해 여운형은 대한을 국호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 “대한은 이미 우리가 쓰고 있던 국호로서 그 ’대한‘ 때에 우리는 망했다. 망한 나라, 일본에게 합병되어버린 대한의 국호를 우리가 지금 그대로 부른다는 것은 감정상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주9) 

  -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며 대한을 국호로 하자고 다시 제안함에 따라 표결해 다수결로 ’대한‘이 채택됨 

  - 그 결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 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으로 정해 국호는 대한민국임을 명시 10) 

❍ 좌익계열이 대한을 거부한 이유 

  - 민족주의자들이 대한이라는 국호를 선점했기 때문 

  - 상대적으로 대한제국의 기억이 없어 대한이라는 국호에 애착이 없었던 청년세대들로서 구시대와의 단절을 중시 11)

 

 

❑ ‘민국(民國)’의 의미와 유래 

 

❍ 민족사적 정통성 계승   

  -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임금과 양반 중심의 군국君國을 넘어 신분차별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평민의 나라, ‘민국’을 추구하고 민국이라는 말을 써왔다는 점에서 ‘민국’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한 국호 12) 

  - 첫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할 당시 ‘대한’은 분분한 논란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민국’은 별 이견 없이 결정 

  - 이미 대한제국도 민국(民國) 건설을 통치이념으로 하였으며 이때 ‘민국’ 이념은 18세기 영·정조 이후 중요시된 소민(小民), 즉 백성 위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것임 13)


 

 

8)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701&tabId=03&levelId=hm_123_0050(검색일: 

2019. 2.26.) 

9)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역사적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56-57쪽 재인용 

10) 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황해문화』, 2008, 48-75쪽 

11) 임대식, 「일제시기, 해방후 나라이름에 반영된 좌우갈등: 우대한, 좌조선과 남대한, 북조선의 대립과 통일」, 『역사비평』, 23호, 39쪽 

12) 민국의 정통성에 관해서는 이태진, 「조선시대 민본의식의 변천과 18세기 민국이념의 대두」, 박충석, 오타나 베 히로시 공편, 『국가이념과 대외인식: 17-19세기』, 아연출판부, 2002: 김백철, 영조대 민국 논의와 변화된 왕정상」,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상)』, 태학사, 2010, 278-296쪽: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역사적 유래 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등 참조   

 

  - ‘민국’ 수립은 3·1혁명을 통해 온 국민의 실질적 열망으로 표출되었고 

  - 상해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함과 동시에 임시헌장에서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정함으로서 ‘민국’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혁명적 변화를 낳음

 

❍ 민국은 중화민국에서 따온 것이라는 주장  

  - 대한민국의 ‘민국’은 1912년에 선포된 중화민국의 민국과 글자가 동일 

  - 많은 이들은 상해임시정부의 국호 대한민국과 이를 계승한 오늘날의 국호 대한민국이 중화민국을 모방한 것으로 봄 14) 

  - 민국을 중화민국에서 따왔다는 중화민국모방설의 유력한 근거가 되는 것은 임시의정원 논의 현장에서 대한민국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 

   ❇ “중국이 혁명 후에 새롭고 혁신적인 뜻으로 민국을 쓰고 있으니 이를 따라 대한민국이라 하는 것이 좋다.”15) 

❍ 중화민국 모방설의 문제점 16)   

  - 민국을 중화민국에서 따왔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민국’이 1912년 중화민국의 선포로 탄생한 신조어야 함 

  - 그러나 중화민국이 선포된 1912년 이전에 ‘대한민국’이라는 용어가 이미 사용된 사례가 많으며 특히 민국은 우리 민족이 이미 영·정조 때부터 써 오던 ‘민족고유의 전통적 술어’ 

  - ‘대한’의 국호가 사대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터에 타국의 국호를 다시 모방했다는 것은 어불성설 

  - 더구나 중화민국은 1913년에서 1917년 간 군벌에 의해 다 망가져버린 상태여서 그것을 모방할 매력을 거의 상실 

  - 민국이라는 글자는 우연히 동일하지만 중화민국의 민국은 정체를 나타내는 공화국과 ‘큰 차이가 없는 동의어’인 반면 17) 

  - 대한민국의 민국은 국체를 담고 있으며, 정체로서의 공화국과는 다른 의미. 이미 대한제국도 민국(民國) 건설을 통치이념으로 하였으며 이때 ‘민국’ 이념은 18세기 영·정조 이후 중요시된 소민(小民), 즉 백성 위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것임 18)

 

❍ 신분차별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의 나라 

  - 민국을 주권이나 통치권의 소재에 따라 구분하는 국체 혹은 정체를 나타내는 말로 간주해 중화민국의 민국과 동일한 공화국, 민주국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 19)



 

 

13) 정옥자, 「훼손된 국가 정통성 되살아났나」, 『동아일보』, 2008. 4. 24.: 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황해문화』, 2008, 54-55쪽 

14) 박찬승,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돌베개, 2013, 137쪽: 이선민, 『‘대한민국’ 국호의 탄생』, 나남, 2013, 90-94쪽: 양영석,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연구(1919-1925)」,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1987, 208-209쪽: 윤병석, 「대한민국임시정부(1919-1945)연구」, 『아시아학보』 13집, 1979, 16쪽 등 

15) 여운홍, 『몽양 여운형』, 청하각, 1967, 41쪽 

16) 비판의 핵심논지는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역사적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75-205쪽. 황태연은 임시의정원 국호결정 당시 민국에 관해 중화민국을 사례로 든 것은 대한이라는 말처럼 격론이 벌어질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사용한 전술적 설득카드였다고 봄(209-218쪽) 

17) 이병호, 「중화인민공화국 국호 작명과정 고찰」, 『동북아역사논총』 45호, 2014, 277쪽 참조 

18) 정옥자, 「훼손된 국가 정통성 되살아났나」, 『동아일보』, 2008. 4. 24. 

 

 

 - 정치사회적 차별형태와 차별여부에 따라 국체를 나누고 민국을 신분제국가와 구별되는 신분적 차별 없는 국민국가의 국체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음 20) 

  - 만약 민국을 민주국이나 공화국과 동일한 국체나 정체로 볼 경우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대한민국헌법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은 동어반복 

  - 이런 동어반복과 의미혼란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은 이미 제헌국회에서 국호를 정할 당시에도 크게 대두

 

❍ 서용길 의원 발언 

  - “제1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랬읍니다. 거기에 국호에 대한민국 이라는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올시다. 또 하나 그 아래 민주공화국이라는 그것을 전문위원이 설명하실 때에 공화국에는 독재공화국도 있고 민주공화국도 있으니 민주공화국이라 했다고 하는 설명을 드렀읍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라는 그 민국은 물론 대답하기를 명사라 하겠지만 그 대한민국이라는 명사 속에는 민주라는 것이 내포되여 있는 옥상가옥으로 여기에 다시 민주공화국으로 할 이유가 없는 줄 압니다.”(6 월 29일 제20차 회의록) 

❍ 김병회 의원 발언 

  -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했읍니다. 민국, 민주공화국, 저는 그 용어에 대해서 잘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민국이라는 것은 결국 민주국을 의미한 것이요. 민국은 역시 공화국을 의미하기 때문에 저는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고」 이렇게 고처서 통과하자는 개의입니다. 민주를 빼자는 것입니다.”(7 월1일 제22차 회의록)

 

 - 민국은 신분적 차별 없는 국민국가를 가리키는 국체로 계몽군주정, 계몽전제정, 민주공화 정 등 다양한 정체를 통해 실현될 수 있음 

 - 가령 현대의 영국, 네덜란드 같은 자유민주주의적 입헌군주정을 채택한 나라는 명분과 의례 상 국민주권국가가 아니라 군주주권국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이 군주와 귀족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정치를 주도하는 국민국가 21)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호를 민국으로 정한 것은 새로운 국가가 왕이나 양반의 나라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의 나라’ 임을 천명한 것이며 

  - 대한민국 임시헌정과 대한민국헌법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정함으로써 민국을 이전의 군주주권 등 여타 다른 정체가 아니라 국민주권의 민주공화정체로 실현한다는 구체적 규정을 둔 것 22) 

  - 대한과 민국의 의미가 합쳐진 대한민국은 ‘대통합된 한민족의 국민국가’23) 혹은 ‘위대한 한민족의 국민이 주인인 나라’24), ‘한민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민모두를 위한 국가’25) 등의 의미   

 

 

 

 

19) 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황해문화』, 2008, 64쪽 

20)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역사적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209-237쪽: 허완중, 「헌법 일부인 국호 

대한민국」, 『인권과 정의』, 2017, 45쪽 

21)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역사적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76쪽 

22) 허완중, 「헌법 일부인 국호 대한민국」, 『인권과정의』, 2017, 46쪽 

23)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역사적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218쪽 

24) 노영돈, 「국호 대한민국의 재음미」, 『北韓』, 2002, 159쪽  

25) 허완중, 「헌법 일부인 국호 대한민국」, 『인권과정의』, 2017, 46쪽 

 

 

❑ 대한민국헌법이 정한 국호 ‘대한민국’의 의의  

 

❍ 제헌과정에서 국호 논란 

   -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칭하는 나라 이름은 다양했으며 헌법제정 당시에도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등 여러 후보가 존재 

   - 1948년 6월 3일, 국회 헌법기초위원회는 국호에 관한 표결에서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대한민국’안을 헌법초안으로 확정 26) 

   - 1948년 7월에 열린 헌법독회 과정에서 국호 대한을 두고 ‘패망한 나라의 국호’,  ‘대영제국이나 대일본제국의 대처럼 팽창주의의 발로’,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 등이 대두 

   - 논란의 와중에 이승만은 논의를 중지시키고 “국호제정이 잘 되었다고 독립이 잘되고 국명이 나쁘다고 독립이 잘 안될 것은 아니”니 대한민국 안을 통과시키자고 제안 27) 

   - 거수표결에서 ‘대한민국’안 찬성이 재석 188명 중 163표, 반대가 2표로 대한민국안 채택

 

❍ 국호 ‘대한민국’에 대한 이승만의 역사적 오해 혹은 착각 

  -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제정되기 전 1948년 5월 31일 이승만이 국회의장 자격으로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함 

  - “우리는 오늘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 우리는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독립민주정부를 재건설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에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체가 우리나라에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야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 운 것입니다. (…)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 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정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연호는 기미년에 기산할 것이오,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할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완전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또 공포하는 바입니다.”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 - 대한민국 국민회의 의장 이승만 

  - 이승만은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누구보다 강력하게 주창했으나 그가 말한 대한민국의 역사적 실체는 불분명함 

  - 이승만이 개회식사에서 말하는 대한민주국, 대한독립민주국, 민국임정은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아니라 서울에 세워진 한성정부이며 

  - 기미년 4월에 ‘대한민국’을 국호로 내건 임시정부는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뿐 

  - 그럼에도 이승만은 착각이거나 편견 속에서 기미년에 서울에 세워진 한성정부를 마치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인 양 말하면서 정작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음 

  - 또한 민국을 서구식의 민주국이라는 정체로 이해함으로써 민국이 지닌 오랜 민족사적 정통성을 제대로 간파지 못하고 있음

 

 

 

26) 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황해문화』, 2008, 69쪽 

27) 『제헌국회속기록』 제28호, 1948년 7월 12일

 

❍ 제헌국회가 국호 ‘대한민국’을 채택한 이유 

   - 당시 많은 제헌국회의원들이 대한민국 국호를 선택한 궁극적 이유는 첫째,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썼던 국호로서 일제의 대한말살책동에 대항해 온 항일의식과 광복의 의미가 담겨 있고

 

❍ 박순석 의원 발언 

 - “대한이라는 두 글자를 쓰는 것을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정신이 대한에서부터 나온 것이올시다. 이 대한을 잊어버리고는 이준 선생 이하 여러 선열의 그 정신을 찾기 위하야 해외에서 무한한 피를 흘려가면서 이 이름을 찾을려고 했든 것이예요. 이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란 말예요. 우리가 오래 동안 이 대한을 찾기 위하야 힘써 나온 우리가 이제 찾는 경로에 섰으니 찾는 이때에 좋은 이름이 있다 할지라도 다음 기회를 봐서 생각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은 그 정신 그대로 나가지 아니하면 안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올시다.”(6 월 29일 1회 20차 회의록) 

❍ 조국현 의원 발언 

 - “왜냐하면 일본에게 침략 당했든 대한을 차자서 광복하자는 것입니다. 이 광복의 의미는 이민족에게 뺏기였든 주권을 찾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 국호 대한을 찬성하는 동시 반드시 국호 대한이라고 쓰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라고 적극 주장하는 바이올시다. ....  혹은 또 말씀하기를 대한은 일본놈에게 병합을 당해서 망해버린 국호이니 모욕적이라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더욱 안 되는 말씀이올시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그럴수록 우리 대한의 국호를 찾어내서 기연코 써야만 그 통념하고 격분한 자손만대에 끼처준 모욕을 역사적으로 시처버릴 것이 떳떳한 일이올시다.”(6 월 29일 제헌의회 1회 20차 회의록) 

 ❍ 신상학 의원 발언 

   - “제1장에 있어서 국호에 있어서 무슨 고려니 조선이니 대한이니 하는 데 있어서 나는 대한이라고 하는 것을 지지하는 바올시다. 그 이유는 우리 기미운동 이래로 해외 혹은 국내에서 모든 선열들이 대한을 그리워서 투쟁하신 선열이 적지 않읍니다. 그렇다면 이 선열의 위안과 원망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대한을 지지하는 것이 좋다 고 생각하는 바올시다.”(6 월 30일 제헌의회 1회 21차 회의록)

 

 - 둘째, 1919년 3·1혁명의 결과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애착과 함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 조국현 의원 발언 

  - “여러분, 우리는 또 과거 36년을 기억하십니까? 대한이라고 말만 하여도 쓰기만 하여도 악독한 왜적은 가두고 때리고 죽이고 하는 가진 잔학, 가진 형벌을 당하지 아니하였읍니까? 모다 우리 대한을 찾자는 것이올시다. 우리의 순국선열은, 우리의 애국지사는, 우리의 대한임정은 무엇 때문이였읍니까? 모다 우리 대한을 찾자는 것이올시다. 

...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호를 씀으로써 거룩한 3․1운동을 살려내며 세계에 천양하고 대한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야 반만년 찬란한 역사를 접속하는 의미에서 나는 우리 국호를 대한이라고 생명을 놓고 절대 주장합니다.” (6 월 29일 제헌의회 1회 20차 회의록)

 

- 셋째, 국민통합과 민족통일의 정치적 지향과 ‘대통합된 한민족의 국민국가’건설의 의지

 

❍ 진헌식 의원 발언 

 - “대한민국은 3․1혁명 투쟁을 통하야 조성된 국호이며 이 역사적 광영을 가진 국호야말로 대내적으로는 민족통일의 기초가 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투쟁의 긍지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해야 됩니다.”(6 월 29일 제헌의회 1회 20차 회의록)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견해이며, 민주연구원의 공식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