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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구제금융' 전당포를 가다!

‘나폴레옹과 이(蝨)’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죄와 벌>에 등장하는 가난한 대학 중퇴생 라스콜니스프. 무대는 어둡고 음습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뒷골목. 합리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인 그는 세상을 소수의 비범한 능력을 지닌 ‘나폴레옹’적 인간(선택된 초월적 강자)과 도덕에 얽매이는 나약하고 평범한 다수의 인간인 ‘이(蝨)’로 인식한다. 


‘나폴레옹’은 인류를 위해 도덕성을 초월하여 도달하여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 라스콜니스프는 ‘이’로 인식되는 불필요한 약자인 다수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악덕고리대급업자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그러나, 라스콜니스프에게 돌아온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죄의식'이었다. 죄의식에 사로 잡혀 ‘거룩한 **’ 소냐를 찾아가 살인을 고백하고 자수하여 영혼의 평화를 찾으며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다. 의 줄거리이다.

악덕고리대금업. 전당포는 이처럼 부정적인 아이콘으로 존재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당포는 100여 년 동안 서민과 함께 한 골목길의 ‘마지막 구제금융’이었다. 지금은 장년이 된 세대치고 시계나 금반지를 맡긴 돈으로 ‘소주 한잔의 추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폴레옹’이 되기도, ‘이’가 되기도 했던 전당포를 추억해 본다.




전당포의 시작

제국주의의 높은 파도가 지구촌을 휩쓸던 18세기 말, 조선은 500년 왕조의 마지막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왕조의 몰락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떠나 아픈 역사를 새겨 놓았다.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의 고통은 더욱 극심하여 초근목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급전이 필요한 가난한 백성이 찾아갈 곳은 없었다. 개항이 늦어진 조선에는 근대적인 개념의 대부업이라고 할만한 제도적 장치가 없었으며 돈 많은 부자를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변통을 하던 관행적인 사금융이 전부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에 몰려들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담보물건을 잡고 돈을 빌려주는 형태의 사채업을 시작한 것이 전당포 영업의 시초이다. 전당(典當)이란 물건(담보물)을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서민이 신용으로 돈을 빌리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전당포는 서민의 동반자이자 약탈자의 양면성을 지니며 급속한 팽창을 하였다.

그러나 높은 금리(초창기 월 이율 7%)로 인하여 고리대금의 대명사로 인식되었고 뜻있는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금전을 노린 강도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1898년(광무2년)에 고종은 법률1호 전당포법을 제정하였고 1961년에 전당포 영업법이 제정되어 관할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아 운영이 가능하였다. 1999년 3월 31일, IMF 시기에 이 법률이 폐지되고 대부업법이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신고를 하면 누구나 전당포를 운영할 수는 있으나 월 3.25%의 이율을 넘을 수는 없다. 10억 미만의 영세한 규모이기 때문에 금감원의 관리감독을 받지는 않고 '뱅크(bank)'라는 용어 또한 '전당(典當, pawn)'과 함께 사용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금은 전당포라는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는 없으나 캐싱(Cash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Paun Bank', 또는 ‘Paun Sho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인터넷 자료 재구성)


전당포 내부의 모습. 이곳에서 40년 세월이 흘렀다. 금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소형 저울이 눈에 들어온다.

세이코 시계가 양주에서 핸드백까지

호남의 대표적 상권인 광주 충장로에서⟨삼삼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는 김일경(76)씨는 전직 공무원 출신으로 친척이 운영하던 전당포를 이어받아 40년 가까운 세월을 전당포와 함께하고 있다. 김일경씨를 통해 ‘전당포의 이면’을 들을 수 있었다.

전당포의 전성기는 60~70년대였다. 국민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기에 ‘낮은 문턱의 전당포’는 영업이 잘되었고 허가제였기에 ‘허가증이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은행의 이자율이 20%를 넘기도 했지만 웬만한 서민은 은행 문턱이 높아서 접근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신용카드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전당포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IMF시절, 국가적인 금모으기가 전당포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시중의 금붙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당포에서 가장 선호하는 물건이 환금성과 가치지속성이 있는 금이기 때문이다.

전당포치고 애절한 사연이 없는 곳이 없다.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 학비를 위해, 약값을 위해, 때로는 군대 가는 친구를 위해, 어머니의 비녀가 등장하고, 손목에 있던 시계가 풀려나오고, 장롱 깊숙이 숨겨 두었던 새댁의 금반지가 나오던 곳이 전당포였다. 서민에게 은행은 '안드로메다 행성보다 멀고 먼 존재'였던 시절, 한 푼이 급해 찾아오는 전당포는 서민의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된 ‘그들만의 보물창고’였다.

전당포에 들고 온 담보물건에서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전당포 영업 초창기에는 ‘허름한 옷가지, 이불보따리에서부터 양복까지 등장했으며, 70년대에는 시계, 트랜지스터 라디오, 선풍기, 세이코 전자시계, 카시오 전자계산기, 전자밥솥, TV 등 간단한 전자제품이 인기였고, 80년대에는 VCR, 비디오카메라 등 고급 전자제품이 많아졌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고가의 패물이 주종을 이루는데 금붙이는 기본이고 다이아몬드 같은 초고가의 보석류도 많다’고 한다. 최근에는 ‘미술품, 자동차는 물론 고급양주와 명품 핸드백까지 전당포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했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전당포에 들어오는 물건의 성격이 변화한 것이다. 저당기간은 통상적으로 6개월이며, 6개월을 연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요즈음은 어떤 사람이 주로 찾느냐?’는 질문에 ‘술값 필요한 대학생부터 곗돈때문이거나 이웃에게 아쉬운 소리하기 싫은 아주머니가 많다’면서 ‘옛날처럼 도박하다가 나온 사람은 줄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잡힐 수 있는 건 마누라 빼고 다 잡힌다’는 말은 옛말입니다. 그래도 급전이 필요해서 찾아왔던 수많은 사람들, 술값이 필요한 대학생부터 아이 약값이 필요했던 젊은 어머니, 실직한 가장, 사업이 망한 아저씨, 명절 때 고향 내려가려던 술집 아가씨----. 다 기억에 남는 사람들입니다.”


급전을 융통하러 온 대학생이 여권을 보여주며 신분확인을 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골목길 구제금융’

‘전당포의 몰락은 카드 때문’이라고 업계에서는 주장한다. 곳곳에 들어선 은행 단말기를 통해 ‘무담보 신용대출에 저금리로 무장한 카드’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산와머니 같은 일본계 대부업의 등장 또한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전국적으로 추산하는 16,000여 대부업체중에서 상위 10위권이 모두 일본 자본을 추정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업계1위인 러시앤캐시의 이자수익은 5,409억원이며, 2위인 산와머니도 전년대비 20%넘는 성장을 기록’하였다. 이들 일본계 자본은 상장이 되지 않아 배당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국부가 유출되고 있다.

최근에 국내 저축은행들이 영업정지 등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들 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려 영업을 하는 곳이 대부업체들이다. 금융업계에서는 이들 대부업체들이 ‘10% 안팎의 금리로 자본을 조달하여 30%대의 대출금리로 높은 이자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전당포의 시초가 식민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었고 전당포의 영업난을 가중시킨 대부업의 상당수가 일본계 자본인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어찌되었든 100여년의 세월동안 골목길의 ‘서민금융’이 ‘일본색깔’을 유지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할 뿐이다.


‘짝퉁’과의 전쟁

전당포의 영업을 힘들게 하는 것은 카드와 일본계 대부업 뿐만이 아니다. 김일경씨는 ‘롤렉스 시계를 제외한 여타 명품을 취급하지는 않지만 다른 업주들은 핸드백이나 명품시계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귀뜸한다. 진짜 같은 짝퉁 때문이다. ‘어떻게 진품을 구별하느냐’고 물었더니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길거리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떻게 아냐’고 되묻는다. ‘척보면 안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자기도 척보면 안다’고 한다.

최근에는 ‘금붙이 안쪽에 납과 같은 물질을 넣고 바깥쪽을 금으로 둘러싼 짝퉁 금반지가 많다’며 ‘이미 여러 업주가 당했다’고 한다. 대부분이 ‘중국에서 가져온다’는 것이다.

김일경씨는 은행의 조기상환수수료에 대해서 목청을 높였다. ‘사정이 되어서 돈을 빨리 갚을 수도 있는데 빨리 갚는다고 벌금을 물리는 것은 악덕한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전당포는 연체료가 없는데 은행권에서는 전당포에 조기상환수수료와 연체료를 받으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고 했다.

전당포가 부정적인 인식이 깔린 저변에 대해서 물었다. ‘장물이나 강도가 들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장물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장물은 그 물건을 취득하는 것인데 자신들은 물건을 취득한 것이 아니라 보관하는 보관업자’라는 것이다.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경찰들이 찾아와 협조를 요청할 때는 힘들다’는 뜻도 살짝 엿보인다. 전당포를 장물의 주요한 유통로로 보는 사법기관의 ‘관행’이 엿보인다.

과거 전당포업에 따르면 “전당물이 장물일 수도 있기 때문에 경찰관서의 범죄수사상의 필요에 협조해야 한다(25·26조). 전당포주가 전당물이나 유전물로서 소지하는 물품이 도품(盜品)이나 유실물(遺失物)로 판명되었을 경우에는 피해자나 유실자는 전당포주에 대하여 이를 무상으로 회복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단, 도난 또는 유실한 때로부터 1년이 경과한 후에는 예외가 된다(24조). 무허가영업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31조).”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전당포 내부 곳곳에 설치된 철문. 현금을 융통할 수 있는 전당포는 때로는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했었다.


전당포의 재발견

국내에서는 사양길로 접어든 전당포가 해외에서는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고급 와인을 담보로 한 전당포가 성업중’이며 ‘중국에서는 문화혁명때 철퇴를 맞았던 전당포가 재등장하여 서민들의 금고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전당포협회에 따르면 “2800여개의 전당포가 운영되고 있으며, 보유자산 규모는 360억 위안(약 7조2,000억 원)에 이른다.” 또한 ‘멕시코에서는 은행대출이 까다로워지자 자동차, 가전제품을 담보로 한 프랜차이즈 전당포가 등장했고 러시아에서도 전당포인 롬바르드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글로벌 외환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전당포가 부활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찾아가는 출장서비스를 표방한 ‘인터넷 전당포’가 등장하고 명품을 취급하는 업소가 생겨나고 있지만 전당포의 부활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탈리아 도미니크 수도회의 어느 신부에 의해서 1428년에 시작’되었고 ‘중국에서는 2200년 전, 한나라 때 처음 등장했다’는 전당포. ‘돈 생기면 반드시 찾아 가겠다’며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며 떠나보냈던 애환과 눈물의 전당포. 그 전당포가 사라지고 있다. 어찌 보면 고리대금의 변형된 형태였던 전당포. 하지만 가난한 대학생부터 등록금 걱정하던 아버지, 약값 걱정하던 어머니의 근심과 눈물을 닦아주었던 ‘골목의 구제금융’은 이제 ‘첨단 금융기법과 서비스로 무장’한 ‘21세기 고리대금’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서민에게 ‘첨단금융기법과 서비스로 무장한 은행’은 '의미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은행 또한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해준다. 전당포와 무엇이 다른가?” 라는 어느 은행인의 자기고백이 귓전을 울린다.



사진. 글  윤영선 (민주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