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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주의자1 - 茶山 정약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공화국을 선언한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언 100년의 역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광복, 한국전쟁, 군부권위주의 독재에 시달리면서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1997년 수평적 정권교체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탄생함으로써 공고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국민주권의 선언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공고화의 길에 이르게 된 것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성취하며 지켜낸 국민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울러 국민의 앞에 서서 사상가로서, 운동가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하고 피와 땀으로 지켜낸 민주주의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있다.


계간『사람과정책』은 연속기획으로 한국의 민주주의에 큰 족적을 남긴 한국의 민주주의자들의 삶과 사상을 연재한다. 한국의 위대한 민주주의자들의 삶을 돌아보며 그 뜻을 계승함으로써 한국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지켜내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한다. 이번호에는 한국의 위대한 실학자로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제도를 열망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을 다룰 것이며 이후 현대사까지 한국의 민주주의자들의 삶과 뜻을 차례로 실을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자1 - 茶山 정약용


“民本을 넘어 民主로”


한상익 (민주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연전에 어떤 유식한, 혹은 유식한 ‘척’ 하는 분이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꽤나 ‘유식스럽게’ -문법에 없는 말이지만, 어쩌랴! 그 때 든 생각이 ‘참 유식스럽게 놀고 있네’였던 것을- 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유식스러운 말씀의 요지를 전하자면, 민주주의란 고대 아테네에서 발현되고 계몽주의 시대 서구 사상가들이 펼친 사회계약론의 전통에서 유래된 평등주의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으로, 온전히 서구적 전통이기 때문에 동양의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해 온 한국은 이런 민주적 가치와 전통이 결여된 나라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한국적 민주주의의 가치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뭐 그런 것이다.


이 말이 거슬렸던 이유는 왠지 10월 유신의 망령을 보는 느낌이라 본능적 반발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주의 가치를 오로지 서구의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듯한 뉘앙스에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서구보다는 늦었고 세도정치를 편 기득권자들에 의해 지체되었으며 결국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이미 18세기 한국에도 성호 이익 등의 실학자들을 필두로 민주적 가치의 싹은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철학적 기반과 제도적 구상의 담대함, 그리고 사상적 깊이와 저술의 방대함으로 볼 때, ‘유식한 분’이 거론했던 홉스와 로크쯤은 한 번에 찜쪄먹고 루소와 존 스튜어트 밀 정도는 입가심으로 해치울만한 민주주의자가 한국 역사에 계시니, 다산(茶山)의 호를 쓰시는 정약용 선생이 바로 그 분이다.


다산의 사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민주주의를 검토해 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어원(Democracy)에서 보듯이 단순히 다수의(Demos) 지배(Kratia)로 정의되는 정치체제, 백성(民)이 주인(主)임이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치체제이면 그 제도적 형태나 현실적 표출과 관계없이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가? 국민주권의 선언만으로 부족하다면, 링컨의 말처럼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of the people), 국민에 의해 정치권력이 선출되고 국민의 통제 아래 권력이 행사되며(by the people), 국민을 위해 일하는(for the people) 정부를 가진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것인가? 혹은 최근 참여민주주의나 전자민주주의론에서 이야기하듯이 선언적 원리와 시민의 참여제도, 그리고 시민의식에 기반한 적극적 행동까지 포괄해야만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신분이나 성별, 인종,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진다는 신념은, 평등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정치적 의사를 최종 결정하는 것은 특권적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오직 1인 1표를 가진 평등한 사람들의 과반수이어야만 한다는 관념으로 나타난다. 평등한 시민들의 총체인 民에게 국가의 주권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다수결이 민주주의에서 불변의 원리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가 기초하는 또 다른 원칙은 정치권력 구성의 ‘하이상(下而上)’이다. 정치권력을 구성하는 유일한 원천은 民의 동의이다. 혈통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초월적 존재인 신 혹은 천명도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의 원천으로 인정될 수 없다. 국민의 동의와 합의만이 정치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民의 저항권이다. 민주주의 체제라면 내남없이 보장하는 양심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권력이 정당하게 만들어졌어도 정당하게 행사되지 못하는 경우 권력을 교정하고 심지어 전복할 수 있는 주인으로서 국민의 권리를 뒷받침한다. 즉, 국가의 주권이 평등한 개인의 총합인 국민에 있으며, 국가의 운영은 이들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담당하되 만일 이 원칙을 어기는 정부가 있다면 당연히 전복되고 교체되는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다산은 이 하나하나의 요소에 동시대 서구 사상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끔은 현대 민주주의의 관념까지 넘나드는 과감한 사상을 전개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762년에 태어나 75세인 18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 好學의 개혁군주였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암행어사도 했고 참의까지 올라 국가 개혁을 위한 자신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다. 또 곡산도호부사로서 자신이 주장하는 ‘목민지도(牧民之道)’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한 뒤 기득권의 화신인 세도정치 세력의 미움을 받아 옥사를 겪으며 결국 18년의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고, 유배 이후에도 다시는 국가 운영에 관여하지 못하게 된다. 다산의 유배와 낙향은 당대와 후대의 한국인 모두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뛰어난 개혁적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다산의 사상과 정책이 국가 운영에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만큼 시간이 있었기에 다산이 자신의 사상과 정책을 방대한 저술로 남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대의 조선 백성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후대에는 다행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당대와 후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는지는 지금 감히 알 수는 없다.


다산이 실학자들 중에서 지금도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목민지도에 있다. 목민심서에서 목민관의 자세로서 칙궁(飭躬: 바른 몸가짐), 청심(淸心: 청렴) 등을 강조한 율기지도(律己之道)는 현대의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경종이며 그의 노인과 청소년, 가난한 자를 보살피고 보건과 구제를 중시한 애민지도(愛民之道)는 현대 복지정책의 원형이다. 반면 그가 목민심서에서 전개한 논리는 후대가 그의 목민지도를 백성을 근본으로 하고(民本) 백성을 위하는(爲民) 단순한 유교적 논리로 오해하게 만드는 데에도 일조했다. 다산도 목민심서에서 “양민(養民: 백성을 기르는 것)함을 목(牧)이라 하는 것은 성현들이 남긴 뜻이다...치민(治民)이란 곧 목민(牧民)이다”라 하여 그의 목민지도가 하향적 윤리인 ‘자(慈)’에 의거한 ‘상이하(上而下)’의 위민사상이라는 후대의 해석을 낳는 빌미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바는 다산이 ‘治民이 牧民’이라 하였지 ‘牧民이 治民’이라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 구절을 후자처럼 목민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다산은 유교적 전통에 충실한 위민사상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른 저술들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구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목민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으로 본다면, 목민심서는 글자 그대로 정부를 맡은 자들이 지켜야 할 바를 서술한 것이며 정부를 만들고 교체하는 민주적 관념을 설파한 다른 저술들과 충돌하지 않는다. 실제로 다산의 다른 저술들을 볼 때, 다산이 유교적 민본주의에 의거한 하향적 위민사상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보기 어렵다.


 다산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평등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천적으로도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였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다산이 사민평등과 노비제의 즉각적 폐지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종모법에 따른 노비제의 문제를 비판하고 노비제의 점진적 철폐를 주장한 바 있지만, 이 역시 급진적 신분제의 타파라기보다는 실천적인 제도 개혁 주장으로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인간 평등에 관한 다산의 관념은 실천적 제도 개혁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언술, 특히 성리학에 대한 비판에서 찾아야 한다.


성리학은 조선 신분제 사회를 정당화하고 유지해온 철학적 기반이다. 성리학적 체계에서 인간은 이(理)와 기(氣)로 구성된 거대한 우주 및 자연과 ‘만유일체(萬有一體)’의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理가 발현된 본연의 성질(本然之性)은 인간과 사물이 다르지 않으며 다만 氣가 발현되는 기질의 성질(氣質之性)으로 구분될 뿐이다. 즉, 인간과 사물이 평등하지 않은 이유는 기질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들도 기질의 성질에 따라 구분되기 때문에 서로 평등한 인간이 아니며 사물처럼 기질에 따른 상중하의 삼품(三品)으로 구분된다. 이런 논리로서 성리학적 신분제는 정당화된다.


그러나 다산은 “本然之性이 인간과 사물 모두 다 같다고 하면 사람만 요순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무릇 사물 중에서도 본연의 성을 얻은 것은 다 요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성리학을 비판하고 인간에게만 本然之性이 있다고 본다.(맹자요의:孟子要義) 따라서 인간을 다시 기질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같은 본연지성을 가진 존재로 본다. 나아가 “사람들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을 들어 본연지성을 발현하는 데에는 만민의 차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이처럼 本然之性을 계몽시대의 ‘이성’처럼 인간만의 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을 사물과 다른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해석하는 것이며 사람의 신분을 나누거나 심지어 노비처럼 사물로 대하는 것은 本然之性을 가진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산은 삼강오륜조차도 이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하는 수직적인 忠, 孝, 烈의 덕목을 강조한 것이 아닌, 상호간
대등한 관계에서 ‘仁’을 행하는 관계로 보았다. 지배와 복종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간 평등하게 권리와 의무를 나누어 가지는 수평적 관계라는 뜻이다. 실제로 열부(烈婦)에 대해 남은 시부모나 아이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넓적다리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한 것 역시 ‘부모가 이를 좋아할 리 없다’면서 不仁한 행위로 비판하였다.


이런 다산에게 현실 제도에 있어 사회신분이란 원래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에 불과하다. 다산은 ‘하늘은 신분을 묻지 않는다’며 ‘모두가 양반이 되면 소위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 없어질 터이니 모두가 양반이 되면 좋겠다’(발원정임생원론: 跋願亭林生員論)고까지 하였다. 다산에게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신분제가 아닌 선택에 따른 직능일 뿐이며(전론: 田論) 서얼에 대한 차별이나 지역적 차별 역시 不仁한 것이다.(통새의: 通塞議, 인재책: 人才策) 이처럼 다산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평등하며 사회의 모든 불평등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당연히 해소해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 나아가 일종의 평등한 공동농장인 여전제(閭田論)를 주장하여 경제적 평등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 평등론에 있어서도 급진적이라 할 만하다.


이런 평등주의적 인간관이 정치권력의 구성 원칙에 적용되면 어떻게 될까? 다산은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 어찌 목민관이 있었던가. 대여섯 백성들이 이웃과 다툼을 잘 해결해준 사람을 이정(里正)으로 추대하고 대여섯 마을이 모여 당정(黨正)을 추대하고...대여섯 당이 주장(州長)을 뽑고..대여섯 주장들이 국군(國君)을 뽑고...대여섯 국군이 방백(方伯)을 뽑고...사방의 방백
이 뽑은 자를 황왕(皇王)이라 하였으니 황왕의 근본은 이정에서 시작되고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있는 것이다.”(원목: 原牧)라 하여 국가권력의 시작을 백성들의 사회계약에서 찾고 있다. 백성의 동의(사회계약)를 통해 정치사회의 기본이 마련된 것이므로 정치의 근본을 이루는 요소는 바로 상호 평등한 백성이다. 국가 권력은 근본이 되는 백성들의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천명이나 혈통에 의해 통치권이 부여된다는 유교의 하향적 정치질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상향적 정치질서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고 민주적이다.


아울러 다산은 군주는 백성들의 동의를 법제화하는 기능적 역할만을 부여받은 존재인데 현실에서 한 사람이 군주가 되어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현실을 타파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대저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이루어진 것은 또 여러 사람이 추대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여섯 백성들이 의논해서 인장(隣長)을 바꿀 수 있고 황제를 바꾸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누가 신하로서 임금을 쳤다고 말한단 말인가”(탕론: 蕩論)라는 다산의 주장은, 비록 임기라는 개념은 없지만 국민이 정치권력의 최고 수장을 교체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민주적 선거제를 연상하게 한다. 유교적 질서에서 교화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던 백성이 다산에 이르러서 드디어 한 국가의 정치적 운명과 왕의 교체까지 결정할 권리를 부여받은 정치의 주체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군왕과 백성이 신분이 아닌 상호 기능적인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군왕은 무조건적인 복종의 대상이 아니며 군왕이 잘못하는 경우 백성은 이를 교정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 다산은 이를 현실에도 적용하는데, 그가 곡산도호부사로서 부임할 때, 전임 도호부사가 잘못된 행정을 하자 백성을 이끌고 항의했던 -요즈음 말로 집회와 시위를 주도한- 이계심이란 사람을 석방하였다.


이때 다산은 “관장이 밝지 못하게 된 이유는 백성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폐단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이계심)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 냥의 돈을 주고서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이 예화는 다산이 가진 두 가지의 민주적 관념을 보여준다. 하나는 정치나 행정을 하는 사람이 부패하거나 잘못하면 국민은 당연히 이를 시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즉 국민은 저항권을 가진다는 관념이다. 둘째, 부패한 지도자를 교정하려 하지 않고 자기 안위만 챙기는 국민을 “교활한 자”로 단죄함으로써 국민에게 통치행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교정하는 적극적 시민의 역할까지 주문하고 있다. 즉, 국민을 민주적 권리의 주체로 간주하는 수준을 넘어 국민에게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시민적 의무까지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유럽에서도 20세기 후반에야 등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무려 이백년이나 앞서 있다.


다산이 전개한 정치이론은 유교적 민본주의를 넘어 국민에게 통치자를 선출하고 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민주주의에 이르고 있다. 다산의 체계에서 군왕을 포함한 목민관은 백성에게 선출되어 통치권을 위임받는 대의민주주의적 대표로 간주되고 동시에 백성은 이 목민관을 감시하고 저항을 통해 교체할 권리와 의무까지 가지는 시민으로 나타난다. 즉 위민주의와 민본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다산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민주주의 사상가이자 행동가로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산은 한국 민주주의자들의 시조인 것이다.


21세기 한국은 다산이 생각했던 민주주의에 이르고 있는가? 현재 우리는 국민주권을 선언한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선거를 통해 목민관-대통령을 포함해서-을 선출하고 있다. 그리고 최소한 법적으로는 항의의 자유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에 의해 선출된 목민관이 율기를 하기는커녕 날로 부패를 더하고 있으며 나아가 MB정부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저항권마저 부인하고 탄압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다산 사후 백오십년이 넘게 흘렀고 민주주의를 위해 그렇게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데도 우리는 다산이 그려냈던 민주주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다산에게 정치란 ‘정의롭고 고르게 살도록 해주는 것’(原政)이라 했던가. 정치가 정의롭고 고르게 살도록 하는 기제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이 자신이 주인임을 자각하고 주인의 마음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정의와 균등의 가치가 더욱 필요한 지금, 민주주의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