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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선생 2주기에 즈음하여

김대중 선생 2주기에 즈음하여
김대중 선생에게 마음으로부터 추도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토 나리히코(伊藤 成彦)


1.
내가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마음속 깊이 새긴 것은 1973년 8월 7일의 일입니다. 나는 막 발매 된 잡지 『世界』(세카이)를 입수하여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편집장과 김대중 선생의 대담 “한국 민주화에의 길”을 읽고, 1971년 4월의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은 김대중 후보는 이런 훌륭한 민주주의자였던가 라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했습니다.


내가 이 대담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의 통일에 대한 투철한 이론이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쪽을 지배하고 있는 박정권은 통일을 할 의사가 없는 정권임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쪽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물론, 통일의 실현을 위해서도 통일에 대한 민족적 양심과 북쪽과의 대등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민주정권을 실현시키는 것이 가장 큰 과제입니다. 남쪽의 국토를 민주화하는 것, 이것이 통일의 대전제가 됩니다. 입니다. 단, 선민주회복이라고 해도 통일운동을 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대로 강하게 추진합니다.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선민주회복도 통일의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일본에서 납치되었다가 귀환한 직후 기자회견하는 김대중 대통령


 


이 얼마나 명쾌한 이론입니까? 그리고 이 대담으로부터 27년 후에 한국대통령으로서 이 이론대로 “가장 큰 과제”였던 민주정권을 구성하여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공동선언을 실현시켰던 것입니다. 이 대담에서 말씀하셨던 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에게 공약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 공약을 29년 후에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선생과 한국국민이 깊은 신뢰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 김대중 선생은 이 대담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우리들 한국민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꼭 떨쳐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나의 허세도 아니고, 희망적 관측도 아닙니다. 나의 살갗과 피가 느끼고 있는 국민에 대한 신념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현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도를 낙관하고 있습니다.”


이 감동적인 대담을 읽은 다음 날인 8일 오후, 나는 김대중 선생이 누군가에 의하여 납치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강렬한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2.
일본의 국회의원으로서 김대중 선생의 납치에 대하여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사람은 우츠노미야 토쿠마(宇都宮徳馬) 중의원 의원이었습니다. 우츠노미야 의원은 납치 전년도의 11월 6일 김대중 선생과 처음으로 만난 이후, 1973년 1월 6일과 8월 4일 세 번을 만나 깊은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첫 대면에서 받은 인상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망명과 같은 형태로 일본에 있던 김대중씨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1월 6일이었다. 나의 조선문제에 대한 기본적 자세는 모든 조선민족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나는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이미 세 번 갔다 왔지만,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다.
한국의 정치가인 김대중씨를 만난 것은 모든 조선민족과의 우호라고 하는 나의 원칙으로 말한다면 상당한 행운으로써 김대중씨와는 한 번 보고 지기가 되었다. 38도선의 긴장을 완화하고 한국민에게 자유를 회복시키겠다는 그의 주장은 원래 나의 주장이기도하며, 북쪽의 김일성 주석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이 두 사람의 김씨는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한 구상에 대해서 정직하고 격의 없는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유엔가맹이나 주한미군문제, 평화협정과 불가침조약의 문제, 남북교류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 두 사람의 김씨가 만난다면 다른 것은 다른 대로 두더라도 일치점을 찾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日本は新しい痣をつくるなー日韓正常化への提案』머리말에서)


이것은 27년 후인 2000년 6월 13-15일에 한국대통령인 김대중씨와 김일성 주석의 아들인 김정일씨 사이에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을 예견하는 것과 같은 문장입니다. 우츠노미야씨는 다음해 1월 6일 자신이 주재하는 아시아․아프리카연구회(통칭, AA연)에 김대중 선생을 초청하였고, 수십 명의 자민당 의원들은 김대중 선생의 한국민주화에 대한 호소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우츠노미야씨는 더 많은 자민당 의원에게 김대중 선생의 호소를 들려주기 위하여 8월 4일에 김대중 선생과 협의를 하였고, 4일 후에 납치된 것이었습니다.


8월 8일 오후 1시경 호텔 그랜드 팔레스에 있던 김경인 의원으로부터 김대중 선생 납치의 연락을 받은 우츠노미야씨는 곧바로 고토다(後藤田) 관방부장관과 다카하시(高橋) 경찰청 장관에게 전화하여 하네다공항을 비롯한 전국의 공항에서 납치범인을 감시하도록 요청하고, 주일미군기지에도 긴급수배를 의뢰하였습니다. 또한 다나카(田中) 법무대신, 에자키(江崎) 국가공안위원장을 숙소로 방문하여 김대중씨의 인권과 일본의 주권에 관계되는 문제로서 엄정한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러나 우츠노미야씨의 재빠른 수사활동 지시에도 불구하고 8월 13일 밤까지 김대중 선생은 생사불명이었습니다. 14일에 김대중씨의 생환이 알려진 후, 우츠노미야씨는 곧바로 아시아․아프리카 연구회의 이시이 하지메(石井一) 의원 등을 서울로 보내어 김대중 선생을 자택으로 찾아뵙게 했습니다. 그리고 8월 28일에 김대중 선생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편지로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김대중씨, 당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인가, 아니면 서울로 데리고 가버렸는데도 냉정하게 있는 일본인가, 일본의 정치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원세개(袁世凱)를 지지하는 일본인가, 손문(孫文)을 지지하는 일본인가, 메이지 40년대의 선택을 일본은 또 다시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손문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金大中氏への手紙」『アジアに立つ』)


내가 이 부분을 빼내어 예를 든 것은 우츠노미야씨는 자주 김대중 선생을 ‘현대의 손문’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3.
나는 1983-84년에 우츠노미야씨의 협력으로 초당파 국회의원․평론가․변호사․대학교수 등 45명과 함께 ‘김대중씨납치사건진상조사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납치사건으로부터 10년째를 앞두고 일본정부가 충분한 수사도 원상회복도 하지 않고, ‘김대중씨체포감금약취사건특별수사본부’의 해산을 발표했기 때문에 시민의 손으로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하여 김대중 선생의 원상회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민간의 김대중씨납치사건진상조사위원회 사무국장으로서 1983년과 84년 2번에 걸쳐서 미국으로 김대중 선생을 찾아가서 납치상황을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그 때, 김대중 선생께서 친절하게 대해주셨는데,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는 없다”는 말씀을 듣고, 이 말을 우리들 활동의 신조로 삼았습니다. 동시에 미국 국무성 레너드씨 외에 많은 분으로부터 귀중한 정보와 자료를 얻어 1987년에 조사결과를 정리하여 『전보고․김대중사건(全報告․金大中事件)』(ほるぷ出版)으로 간행했습니다.


그 후, 1990년대가 되어 한국민주당대표단이 일본에 김대중납치사건을 조사하러 왔고, 1993년에는 한국의 변호사 한승헌 선생을 비롯한 시민 여러분들이 ‘김대중선생납치진상규명시민의모임’을 조직하여 일본의 시민운동과 협력관계를 맺고, 2003년까지 10년 동안 공동으로 진상규명을 계속했습니다.


4.
다음으로 2007년과 2008년에 김대중 선생으로부터 얻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귀중한 기회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2007년 6월 13-14일에 6․15남북공동선언 7주년기념국제회의에서 “한반도에 있어서의 평화과정과 평화체제”에 대하여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중심테마는 현재 한반도의 평화구축에 대한 제안이었습니다만, 일본인인 나로서는 침략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로부터 말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발언의 제1부를 “과거의 청산과 극복”으로 하였습니다.


2007년은 정확히 제1회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온지 400년이 되어,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 1607년의 조선통신사는 히데요시(秀吉)군에 의하여 강제 연행된 7만 명을 넘는 조선청년을 귀국시키기 위하여 왔기 때문에, “납치”라고 하는 일한(북) 간의 불행한 역사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1904년의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의 독립을 빼앗고, 병합을 강제하고 구미를 모방한 식민지지배는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고 문화․언어․성씨를 금지하고 전쟁을 강제하며 많은 청춘남녀를 강제 연행하여 인권을 유린하는 등, 그 지배는 구미보다 훨씬 가혹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지배는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을 자유․독립국으로 한다”고 약속한 1943년의 카이로선언을 무시한 미국 트루먼 정권의 남북분단정책에 협력하는 것으로 식민지지배의 책임과 청산을 회피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인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로운 장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히데요시 이래의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의 과거청산과 극복이 불가결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장래의 전망”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첫째로 핵무기문제의 해결로서 6자회담에서 “동북아시아비핵평화지대”를 선언하고, 일본과 한국에서 미국의 핵우산을 철거하여 비핵화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핵무기의 완전금지를 결의하고, 유엔총회에서 모든 핵무기를 유엔의 관리 하에 놓고 파기할 것을 결의하고 실행할 것.


둘째로 아시아의 평화에는 각국의 평화정책만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동아시아평화공동체의 형성이 불가결하며, 그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1)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정상회담을 포함한 각종 대화, (2)일본의 침략, 지배, 전쟁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장래의 ‘부전선언’으로써 헌법 제9조의 준수, (3)모든 군사동맹을 평화우호조약으로 전환, (4)모든 군대를 재해구조, 국제평화협력부대로의 전환, (5)유럽공동체와 같이 국경을 낮추어 문화, 경제, 지역자치 등 시민레벨에서의 자유로운 교류를 깊게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회의 후에 김대중 선생으로부터 히데요시 침략 이래의 역사지적이 좋았다는 칭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5.
2008년 12월 16일은 김대중 선생의 노벨평화상수상기념 2008년 국제회의에서 나는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계를 어떻게 정상화시킬까”라는 주제를 받았습니다. 북일관계는 언뜻 봐도 엄중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모두가 일본 측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아직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 청산, 보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일관계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小渕)수상의 신뢰관계에 의하여 1998년에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파트너십 선언’이 조인되어, 그 후 한일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어 미증유의 한일친선시대가 되었습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일평양선언을 한 것은 김대중 선생의 햇볕정책 덕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일본정부에 성의와 용기가 있으면 북일관계는 호전되었을 것입니다만, 미국 부시정권이 북일평양선언에 강하게 반대함으로써 고이즈미 내각은 북일선언에 반하여 ‘납치문제’를 구실로 ‘제재정책’으로 전환하고, 더욱 일미일체가 되어 ‘북한경시’ 정책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발언의 마지막에 김대중 선생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6자회담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6자회담이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2000년 6월의 남북공동선언 이래, 김대중 선생과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창조야말로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서 6개국 시민이 협력하여 6개국 시민평화회의를 구성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김대중 선생에게 그 의장을 부탁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김대중 선생은 회의가 끝난 후, 아주 좋은 보고였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김대중 선생에게 이렇게 부탁드린 것은 첫째로 6자회담은 동북아시아의 평화기구로서 원래부터 김대중 선생이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김대중 선생은 우츠노미야씨가 시사했던 것처럼 진정한 ‘현대의 손문’으로서 아시아평화공동체 창조의 선두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정치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선생은 서거하셨지만, 선생의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사상, 이상을 살리고 넓히면, 꼭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아시아평화공동체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 선생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유지는 앞으로 더욱 커다란 역할을 계속 담당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