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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주의와 부마민주항쟁

 


1.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의의



 올해로써 부마민주항쟁은 32주년을 맞는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 국민의 기억에서 부마민주항쟁은 먼 과거의 일로서 잊혀지고 있다. 격동하는 현실의 변화가 부마민주항쟁을 멀고 먼 역사의 뒤안길로 밀쳐버린 것인지, 우리 스스로 그 소중한 의미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스산한 단상이 뇌리를 스친다.
 50대 이전의 국민들이 항쟁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예 모른 체 살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 날 목이 쉬어라 외쳤던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메아리에 불과한 것인가. 1979년 10월 16일에서 18일까지 한반도의 남단 부산, 마산 일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 세세한 내막은 자세하게 말할 수 없으나, 왜 그 때 항쟁의 불길이 치솟았는가는 알아야 한다.
 먼저 70년대 후반의 정치정세다. 소위 ‘긴조시대’라고 불렀던 ‘긴급조치시대’의 개막으로 인한 억압과 통제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사태가 일상화되었다. 당시 한국사회의 통제장치는 다양한 형태로 작동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수단은 ‘국가보안법’과 그 보조 장치로서 ‘안보이데올로기’의 동원이었다. 이러한 탄압법을 기반으로 국민의 각종 요구를 중앙정보부, 국군보안사령부 등의 사찰기관을 통해서 억압하고 최소한의 생존권적 요구마저도 정치적으로 왜곡하기 다반사였다. 박정희 장기집권을 제도화한 유신체제는 이러한 정치의 극단적 결정판이었다. 유신체제는 긴급조치발동을 헌법상으로 명문화하고 ‘사회안전법’의 제정과 노동관계법, 집시법의 개정을 통해서 민주화 요구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긴급조치권의 발동에 의존한 통치체제였다.
 1974년부터 공포된 1호부터 9호까지의 긴급조치는 국민을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는 전대미문의 ‘우민법’이었다. 인간의 내면(conscience)까지도 검열하고 통제하는 긴급조치는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보다 우위의 법적 권능을 과시했던 것이다. 특히 1975년 5월 13일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학원, 언론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민주화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악법이
었다. 그 내용의 대강을 보면 유언비어 금지, 유신헌법 부정행위금지, 정치적 성격의 일체 행사 사전허가 또는 금지, 이러한 조치에 대한 비방금지, 비방내용 방송·보도 금지, 이러한 조치는 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등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연상케 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권력에 의해서 법의 이름으로 강요된 것이다.
 또한 부마민주항쟁이 단순히 1979년의 정치정세와 박정희 장기집권만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경제적 배경으로 인하여 항쟁은 학생시위를 넘어서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발전했다. 1960년대 이후부터 본격화된 산업화는 독점자본의 형성과 한국사회 내부의 계층분화를 가속화시켜 농민층의 몰락과 임노동자계급의 확대를 가져왔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화를 통해서 독점자본의 강화와 외국자본의 유입을 확대했다. 이로써 한국자본주의는 독점적 지배와 예속구조를 규정적 성격으로 형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축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대다수 국민의 희생과 고통, 궁핍을 필연적으로 수반했다. 노동력의 극한적 소모를 요구하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 높은 산업재해율, 농업 기반의 와해, 농민층의 분해와 이탈 등의 문제점이 속출했다. 당시 부산·마산 지역은 이러한 문제점들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면서 그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점은 부산·마산 지역만의 특수성이 아니다. 당시 한국경제구조의 전반적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마민주항쟁은 (1) 유신체제의 억압통치에 대한 분노와 저항, (2) 반민중적 경제구조에서 결과하는 강도 높은 착취와 빈곤 심화, (3) 1979년 들어 상대적으로 악화된 부산 및 마산지역의 경제상황, (4) YH사건 및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제명사태, (5) 이에 부산·마산 학생들과 시민들의 가두시위와 연대 등의 요인이 상승적으로 결합하면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객관적인 정치경제적 모순구조에 대한 주체적 대응 역시 항쟁 발생과 진화의 중요한 변수이다. 그래서 부마민주항쟁 주도 세력의 자각적 결집과정이 어떠했는지도 중요하다.
 부마민주항쟁결과 70년대 후반에 부산의 민주화 운동세력은 크게 보아 전통적인 학생집단과 교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비판적 청년조직의 두 갈래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흐름은 인적, 조직적 차원에서 상호 결합되어 있었다. 또한 70년부터 빈발하기 시작한 노동문제에 대한 대응 역시 부마민주항쟁의 주도세력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부산지역의 민주화 역량을 예비하는 조직 중에서 특기할만한 것으로 부산양서조합의 활동이 있다. 오늘날의 도서대여점을 연상케 하는 양서조합은 양서(良書)를 매개로 한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운동세력의 결집조직이었다.
 그럼에도 부마민주항쟁은 성과 못지않게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미완의 항쟁이라는 규정 속에 그 한계가 함의되어 있다. 유신체제의 종말이 항쟁 그 자체의 힘이 아니라, 정권내부에 의해서 이루어짐으로서, 유신체제의 형식적 붕괴만을 가져왔으며, 따라서 유신체제의 망령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독재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리고 항쟁의 확고한 지도중심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초기부터 지도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항쟁의 전개과정에서 지도부가 조직될 수 있을 것이다. 전개과정 역시 지도역량이 부재한 가운데 분산성, 자발성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도중심이 없었다는 것은 향후 항쟁의 성과나 과제를 담보하고 추동할 수 있는 역량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의 한계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일정정도 극복되었지만 반복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항쟁의 발발·진전 과정의 구체적 설명은 여기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다. 다만 부산·마산 민주화세력은 위축된 정치공간 속에서도 그 힘을 키워 오고 있었다는 점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향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되돌아본다면 70년대는 아득한 중세적 미망과 질곡 속에서의 삶이었다. 이것이 먼 이야기도 아닌 불과 30여 년 전의 우리 민주주의의 실상이었다. 부마항쟁은 이러한 반민주적 억압 상황에 종지부를 찍는 일대 항거였고,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로 이어진 도화선이 되었다. 이것으로 부마항쟁은 봉인된 채로 망각의 늪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부마항쟁 이후의 역사적 경과가 보여주듯이 그것은 도도한 민주화 물결의 시발점이었다.
 12·12사태와 신군부의 등장, 80년 5·17 계엄령 확대조치, 5·18 광주민주화운동, 87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마민주항쟁은 민주화 대장정의 서막을 여는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견고한 철옹성같이 무한 지속할 것처럼 보였던 박정희 장기집권의 유신체제가 그렇게 쉽사리 와해될 줄은 아무도 몰랐었다. 그러나 독재자는 사라졌고 유신체제는 붕괴됨으로써 민주주의 새 세
상이 목전의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신군부의 등장도 국민의 이러한 기대를 꺾지는 못했다. 물론 우려는 있었다. 80년 ‘서울의 봄’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봄이 도래하는 서곡으로 여겨졌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학생 시민들의 열기를 누구도 누를 수 없고 역사의 시계바퀴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강고한 군부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질식할 듯한 현실이 도래한 것은 이후의 역사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광주 5월의 민주화 투쟁이 무참하게 진압되고 매도당하면서 ‘겨울공화국’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한국민주주의는 다시 한 번 동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좌절과 퇴행의 연속에서도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는 불굴의 힘으로 명맥을 이어오면서 마침내 6월 항쟁의 함성으로 되살아났다. 다시는 역전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것이 87년 헌법의 제정, 소위 ‘87년 체제의 탄생’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은 이러한 전체적 흐름 속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아쉬운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항쟁의 정신이 실종되어버린 듯한 작금의 현실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6월 항쟁과 87년 체제의 성립으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달성되었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87년 체제의 구체적 성과이자 민주개혁세력의 빛나는 금자탑이다. 지금 87년 체제의 전환과 민주주의의 공고화, 사회민주화 등을 지적하는 담론이 제기되면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다시 모색해야한다는 움직임이 일각에서 일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에서 시작된 한국민주주의의 대장정은 여전히 갈 길이 남아있으며 그런 점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역사 속에서 그러하며 실천의 영역에서 더욱 그러하다. 즉 부마민주항쟁은 미완의 항쟁인 것이다. 물론 모든 역사적 격변을 추동한 항쟁은 자기완결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부마민주항쟁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항쟁의 의의와 의미를 실천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2. 부마민주항쟁특별법 제정의 의의와 필요성



 역사 속에서 부마민주항쟁을 올곧게 자리매김하고 그 의의를 가감없이 선양하기 위해서는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 현재 관련 법안이 국회에 의원발의 형식으로 제출되어 입법을 기다리고 있다. 민주당 조경태 의원의 대표발의법안과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의 대표발의 법안이 동시에 제출되어 있다. 두 법안은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양 법안은 부마민주항쟁의 정의, 위원회의 구성방식과 존속기간, 국가유공자와 관련자의 정의, 구금자 문제 등에 있어서 상이한 규정을 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입법정신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실 아직까지 부마민주항쟁 특별법이 제정되지 못한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다. 지난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10년 기간 동안에 진작 제정되었어야 할 법안이다. 정치정세와 입법환경을 탓하기보다는 관련 단체와 민주세력이 자성할 대목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특별법 통과는 이번 정기국회 회기 내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민주개혁 세력의 중심인 민주당이 반드시 해내야 할 몫이다.
 일부에서 특별법제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법적 안정성 훼손을 우려하는 모양이다. 기존 「민주화운동보상법」에 의해서 명예회복과 보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사건에 대해서만 별도의 법을 만들어서 추가적인 조사와 보상조치를 하는 것은 다른 민주화운동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유사입법의 초래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운동보상법」에는 부마민주항쟁의 진상규명은 처음부터 없으며, 부마민주항쟁관련자의 법적 처리의 특성상, 즉 면소판결자가 많은 관계로 보상에 원칙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특별법제정을 통하지 않고는 부마항쟁관련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은 쉽지 않을 것이다.
 부마민주항쟁관련 단체가 주장하는 특별법제정의 의미는 다음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부마민주항쟁의 진상을 명백하게 규명하고 부산·마산 시민들의 억압적 국가기구에 대한 저항이 민주헌정 회복을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부마민주항쟁의 의의를 안정적으로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근거 마련이다. 그리고 「민주화운동보상법」으로 특정, 판별하기 어려운 항쟁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특별법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항쟁의 의의가 계승·발전하여 새로운 정치지형의 모색과 실현의 계기를 만드는 일이다. 30년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 항쟁의 정신을 되살리고 새로운 정치질서 창출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이 부분이 실로 어려운 난제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된다. 어느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엄중한 숙제이다. 특별법 제정만으론 이러한 과제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잘 알고 있다. 부산·경남 지역 국민들의 각성된 집단의지와 실천적 노력이 더 중요하고 결정적 관건이다. 그러나 법적인 근거와 지원이 있으면 이러한 과제 달성은 한결 수월하고 안정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것이다. 물론 법안 통과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이 첨예하게 대립하거나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법안발의 의원을 위시한 법제정 추진세력의 몫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그 중심은 민주당이다. 민주진보진영의 중심으로서 민주당은 소명감을 가지고 이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남부민주벨트’ 복원과 실천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광주와 마산과 부산을 잇는 민주화 전통의 정신을 자산으로 삼아 민주정부 창출의 중요한 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현 정세 하에서 대단히 고무적이며 항쟁 정신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부마민주항쟁을 한낱 과거지사라거나, 특정지역에 국한된 일이라고 경시해서는 안 된다. 한국민주주의의 진전에 일대 분수령을 이룬 부마민주항쟁에 그 이름 값하는 특별법 제정은 민주당이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감히 생각한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을 찬란한 과거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념품처럼 보관하자는 생각은 잘못된 단견이다. 단지 기념하기 위해서 특별법제정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항쟁의 정신과 의미를 지금 여기의 정치현실에서 실천하는 일이 특별법 제정보다 더 시급하고 소중한 일이다.


 


 


3. 앞으로의 전망


 내년에는 알다시피 제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이 예정되어 있다. 참으로 막중한 시기이다. 민주개혁세력의 정권창출이야말로 부마민주항쟁 정신의 진정한 구현일 것이다. 부산·경남은 20년 동안 특정 정당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부산·경남은 3·15 부정선거 규탄, 4월 혁명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고 선도적으로 투쟁했으며, 전통적으로 야당정치세력이 우세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지역감정을 이용한 지역주의적 투표행태가 심화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결정적으로 1990년 3당 합당이 부산·경남을 공고한 지역주의의 아성으로 만든 것이다. 항쟁의 정신과는 정면 배치하는 정치지형이 부산·경남 지역을 꽁꽁 묶어 버린 것이다.
 이 지역 민주세력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했으며 때로는 패배주의에 젖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답답한 현실을 망연자실하게 보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지역주의 정치구도에 온 몸을 던지면서 이를 타파하는 데 전력투구한 움직임이 결코 단절된 적은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을 망정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던 것이다.
 지역주의에 도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쟁은 역으로 그 벽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시도하고 싶지 않은 거대한 벽에 푸르른 담쟁이 넝쿨처럼 도전했다. 노무현정신은 한 담대한 정치인이 지역주의에 도전한 희생적 정신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실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만큼 부산·경남의 민주세력은 실의와 좌절의 연속 속에서 암중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광은 비치고 요동치는 민심 앞에서 거대한 벽은 균열조짐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의 민주주의 역진, 경제파탄, 남북한관계의 냉각, 민생경제의 악화, 국가균형발전의 후퇴로 민심은 흔들리면서 민주개혁세력에게 절호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작년 6·2 지방선거에서 그러한 조짐은 상당한 정도로 드러났다. 경남에서의 무소속 김두관 지사의 당선, 부산시장선거에서 민주당 김정길 후보의 선전, 기초의회선거에서의 약진 등으로 민심의 거대한 물줄기가 변화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부산·경남 지역의 국민들도 민주개혁세력 못지않게 갈증을 느끼며 대안세력의 부상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주의의 덫에 걸린 민심이 주술에서 깨어나듯 그 멍에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지역민심에 화답하고, 어떻게 감동시킬 것인지는 온전히 이 지역 민주개혁세력의 몫이다. 여기에서도 그 중심은 민주당이다. 그러나 민주당만으로 어렵다. 통합과 연대 그리고 혁신을 통해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공은 민주개혁세력 진영으로 넘어와 있다. 이러한 절호의 기회, 천재일우의 기회에 올곧게 대응하는 전열정비와 콘텐츠의 구상이 시급하고 중요하다.
 이 점과 관련하여 민주당은 열린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야권연대, 야권통합, 시민사회진영과의 통합과 연대에 있어서 민주당은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하지만 주도권에 집착하는 모습은 삼가야 할 것이다. 지난 10월 3일 개최된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단일화후보경선의 결과에 민주당이 보인 태도와 대응은 우려를 금치 못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정당에는 정당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 이것은 우선적 정당정책으로 구현되지만 귀속감, 자부심 등 심리적 요인도 중요한 요소이다. 중요한 선거에 자당후보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 위기감이 들 수도 있다. 또한 당의 공식 후보가 비정당 출신의 후보에게 패배한 상황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신의 정체성과 책무를 너무 편협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못했다고 자책할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진영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당장에 내년의 총선과 대선국면에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각변동이 있을 것이고 이러한 격동국면에서도 민주당은 의연히 그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의 사태에 실망하기 보다는 시민사회와 국민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심기일전의 각오를 다지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이행할 프로그램의 개발이 중요하다. 통합과 연대의 정신이 민주당의 정체성의 핵심이 되어야 한
다. 당연히 당 운영과 정책활동의 기조도 혁신을 기반으로 한 통합과 연대에 기반해야 한다. 비판세력 못지않게 우호세력과 외곽지원세력이 시민사회진영에 널리 존재하고 있다. 다만 민주당이 어떤 자세를 유지하느냐에 따라서 사정이 사뭇 달라질 것이다. 부산·경남지역의 정치지형변화를 추동하는 데 있어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민주당만으론 부산·경남지역의 민주개혁진영의 정치세력화가 힘든 것은 지난 6·2지방선거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통합이든 연대든 야권단일후보만이 선거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부산·경남이 민주개혁세력의 전진기지로 다시금 태어나는 계기를 만들어가는 것에 부마민주항쟁의 진정한 실천적 과제가 있는 것이다. 30년 전의 항쟁정신이 그 동안 잠복하여 저류를 이어오면서, 마침내 분출할 계기를 맞은 것이다. 특별법제정 못지않은 중요한 일이 「운명」의 내년이다. 부마민주항쟁이 한국민주주의에 다시 한 번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무겁지만 기대에 찬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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