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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주의자 3 - 장준하

민주주의를 위해 꽃처럼 지다  - 민족을 사랑한 장준하의 치열한 삶과 죽음 -



 ‘정도’를 택한 고난의 출발 


광복군 장교, 백범 김구 선생 비서,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에 가장 치열하게 싸운 언론인, 4월혁명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잡지사 사장, 졸개보다는 수괴를 향해 비판한 야당 정치인, 유신체제에 맨 앞에서 투쟁한 재야인사, 국가원수를 대놓고 친일파라고 호통쳤던 투사, 재야 대통령, 등산길의 의문사, 장준하 선생 앞에 붙는 수식어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아니라 그 길이 정도냐 사도(邪道)냐를 먼저 살펴라.” - 백범 김구의 어록이다. 두 갈래 길이 있을 때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일제 말기 식민지 조선 청년들은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충용스러운 일왕의 적자(赤子)’들은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서 일본군에 지원하고, 충성심이 없는 청년들은 강제 징병과 징용에 끌려갔다.


‘현실적인 사도’를 택한 이들은 일본군에 복무하면서 더러는 조선의 항일 청년들에게 총질을 하고 일제에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일제 패망 뒤에 귀국하여 권력자가 되었다. 박정희ㆍ백선엽 등이다. ‘비현실적인 정도’를 택한 청년들은 이역의 전선에서 이름 없이 산화하거나 민족해방 뒤 귀국하여 민주주의 전사가 되었다. 장준하ㆍ김준엽 등이다.


‘현실적인 사도’가 승리하고 ‘비현실적인 정도’가 패자가 되는 사회는 크게 잘못된 구조이다. 장준하는 이 같은 모순구조를 바로 잡기 위해 ‘해방 조국’에서 다시 온몸을 던졌다. 백범을 보좌하여 통일정부 수립에 열정을 바쳤다. 하지만 분단 정부가 수립되고 백범은 친일ㆍ분단세력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장준하는 몇 차례나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훈련을 받고 일제에 충성했다면, 생명을 건 6천리 장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해방 뒤 군요직을 거쳐 5ㆍ16쿠데타 세력과 손잡고 잘먹고 잘살고 자식들도 모두 출세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자식 중에는 차기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귀국하여 이승만 밑에 있던 고향친구가 부를 때 그쪽으로 옮겼으면 분단정부나마 12년 권세를 누린 이승만 정권에서 한 자리 톡톡히 했을 것이다. 그의 능력으로 보아 누구 못지않게 윗자리를 차지했을 터였다. 시쳇말로 줄을 ‘잘못’ 선 것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일군을 탈출하여 돌베개를 벼고 온갖 사투 끝에 어느 날 불로하 강변에서 불렀던 애국가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까짓 양심을 속이고 번의를 한들 누가 따지겠는가. 일본군 장교 출신들도 눈 딱 감고 애국을 내세우고 ‘조국근대화’를 부르짖는 판에 광복군장교 간판이면 평생을 울궈먹어도 남을 자산이 아니던가.


목사 아들이어서 기독교인이라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고? 일제에 협력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대형교회 지으면서 권력자 바뀔 때마다 조찬기도회 열어 ‘영생복락’ 하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장준하가 믿는 기독교는 달랐을까.


장준하는 1953년 부산 피난지에서《사상계》를 발행했다. 국민정신 계도와 민주주의 사상


을 진작시키지 위해서였다.


 


이 지중한 시기에 처하여 현재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민족의 동량은 탁고기명(託孤寄命)의 청년이요, 학생이요, 새로운 세대임을 확신하는 까닭에 본지는 순정무구한 이 대열의 등불이 되고 지표가 됨을 지상의 과업으로 삼는 동시에 종(縱)으로 5000년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 잡고 횡(橫)으로 만방의 지적소산(知的所産)을 매개하는 공기(公器)로서 자유ㆍ평등ㆍ번영의 민주사회 건설에 미력을 바치고자 한다. - 장준하《사상계》헌장.



 


 ‘사상계 세대’ 4월혁명의 전위로 키워


 장준하는 중경임시정부 광복군 시절에《등불》과《제단(祭壇)》을 발행했다.《등불》은 몸을 태워서 조국광복의 ‘등불’이 되겠다는 의지로,《제단》은 조국광복의 ‘제단’에 온몸을 바치겠다는 뜻이었다.


이를 이은 월간《사상계》는 전후 척박한 한국사회 지성의 요람이 되었다. 국민의 인권의식과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가르치고 주권재민사상을 폭넓게 탐구하였다. 아울러 점차 장기집권을 기도하면서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비판하는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사상계》는 1957년 8월호에 함석헌의《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을 실었다.


 


일본 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ㆍ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ㆍ25는 그 꼭두각시의 놀음이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는 될 것이 없지 않는가. - 함석헌〈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장준하는《사상계》의 문을 닫을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싣고, 함석헌은 구속될 각오를 하면서 이 글을 썼다. 이승만 정권은 두 사람을 구속, 필화사건이 일어났지만《사상계》는 불티나게 팔리게 되었다.


장준하는 권력에 굽히지 않고《사상계》를 통해 반독재 필봉을 날렸다. 1950년대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고, 1960년 4ㆍ19혁명은《사상계》를 통한 자유 민권 세대가 주도하는, ‘사상계 세대’의 성과였다. 장준하와 함석헌은 ‘사상계 세대’의 산모가 되고 민주주의 실천의 교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장준하는 4월혁명 다음 달에 발행한《사상계》권두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유라는 나무는 피를 마시며 자란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서구사회의 민권운동이나 미국 시민들의 자유를 쟁취하기까지의 노정이 가장 잘 압축되어 표현된 말인줄 압니다. 실로 ‘자유’니 ‘민권’이니 하는 말은 그저 안일한 농담이 아니고 이것을 찾으려는 ‘전사들의 피’로 새겨놓은 말들임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민권운동도 이제 피를 흘


리기 시작하였으니 만방의 자유민들 앞에 머리를 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천인이 공노할 관권의 야만적 횡포 아래서도 그저 울고만 있는 유약한 백성이란 낙인은 우리에게 다시는 찍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상계》, 1960년 5월호 권두언.


 


장준하는 장면의 민주정부에서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으로 임명되어 국토건설대를 조직, 이들의 사상ㆍ정신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장대한 비전이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장준하의 국토건설본부 프랫을 도용한 것이었다.


장준하의 생애는 1년여 뒤 일본군 출신 박정희가 주도한 5ㆍ16쿠데타로 다시 시련을 겪게 되었다. 모든 언론에 재갈이 물리고 가혹한 정치보복이 자행되었다.《민족일보》조용수 사장과 편집간부들이 줄줄이 체포되고, 조 사장은 처형되었다. 장준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함석헌에게 글을 부탁했다. 이 때 쓴 글이〈5ㆍ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이다. 함석헌은 감옥에 갈 각오로 글을 쓰고 장준하는《사상계》문을 닫을 각오로 글을 실었다.


 


그런데 나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 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이 아니다. 의사 온 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5ㆍ16을 어떻게 볼까?〉,《사상계》,1961년 7월호.


   


5·16쿠데타 이후 가장 뼈아픈 비판을 받은 쿠데타 세력은 장준하와 함석헌을 구속했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질긴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고, 장준하의 고달프고 시련에 찬 새로운 ‘민주장정’도 계속되었다.《사상계》가 반 이승만 투쟁에서 반 박정희 투쟁의 전위가 되는 시발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장준하를 ‘부패 언론인’으로 몰았으나, 장준하는 일생 ‘부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사상계》가 한때 10만부 이상 팔리고,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자식들 대학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평생 전셋집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장준하가 쿠데타세력에 의해 ‘부패언론인’으로 몰리고 있을 때 필리핀 막사이사이 재단에서 1962년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부분 수상자로 결정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이었다. “지식인들이 국가재건에 정력적 참여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불편부당한 잡지를 발간함에 있어서 성실성을 나타냈고 금전상의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을 잡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계몽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찾게 하였다.”가 수상결정 이유였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대일굴욕회담을 추진하자 강경한 투쟁에 나섰다.《사상계》는 대일굴욕회담 반대의 지침이 되는 특별증간호를 만들고, 장준하는 야당과 재야가 구성한 범국민투쟁위원회의 연사로 나서 전국을 돌며 박정희의 과거 행적을 들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했다.


이에 앞서 5ㆍ16의 제2인자 김종필과 ‘민족주의 논쟁’을 벌였다. 쿠데타세력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민족적민주주의’라고 분장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세력을 압살했다. 이에 맞서 장준하는 저들(박정희와 김종필)의 민족주의는 국민세금으로 호화 해외여행을 하면서 호텔 로비에서 향수에 젖은 노스탈쟈이지만, 자신은 중원 평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임시정부


를 찾아갔던 민족주의라고 대비했다.


박정권의 보복은 가혹했다.《사상계》의 고사작전이었다. 판매를 방해하고 세무조사를 통해 압박했다. 집필자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서점에서 반품이 쏟아졌다. 삼성재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다. 장준하는 1966년 10월 민중당이 주최한 밀수규탄대회 연사로 나섰다. 그리고 “박정희는 밀수왕초”라고 규탄했다가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되었다. 장준하는 정계에 투신하게 되었다.《사상계》는 고사 상태이고 박정희의 폭정은 심해지고, 반독재 투쟁의 길은 정치 밖에 없었다.


 


박정희와 사생결단, 의문사로 


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 당선된 장준하는《사상계》발행권을 부완혁에게 넘기고 야당정치인이 되었다. 박정희 시대 야당 의원의 길은 쉽지 않았다. 일체의 정치자금을 사절하고 유진오 총재가 주는 ‘떡값’도 사양했다. 그리고 강경한 대정부 투쟁을 전개했다. 당내에서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고, 자금이 돌지 않은 지역구 사정도 어려워졌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쿠데타를 자행하여 3선개헌으로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 반 만에 또 다시 헌정질서를 짓밟았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장준하는 유진산이 이끄는 신민당을 버리고 신당인 통일당의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관권 동원은 물론 신민당 후보측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고 낙선되었다. 유신체제에서 국회의원 출마 자체를 거부하지 못한 것을 못내 후회하였다.


다시 재야에 선 장준하는 박정희가 긴급조치를 발동하자 함석헌ㆍ백기완 등과 100만인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주도하면서 유신체제의 정면 돌파에 나섰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비상보통군사재판에서 긴급조치 위반을 이유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의 중형이었다. 1년여 옥살이를 하는 동안 심장협심증과 간경화증세의 악화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가석방으로 풀려났지만 폭압통치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1975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장문의 공개서한을 보냈다. 신문, 방송에서는 장준하의 글이나 말을 전해주지 않아서 택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정지시키고, 헌법제정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강압적인 계엄하에 묶어놓고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제정한 소위 ‘유신헌법’으로 명실상부하게 귀하의 1인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장준하,〈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권력의 보복은 가혹했다. 뒷조사가 계속되고 사람들도 만나기를 꺼렸다. 박정희가 “장준하를 그냥 두고는 대통령을 못해먹겠다”고 했다는 말이 나오고, 재야에서는 ‘재야 대통령’이란 호칭이 나돌았다.


장준하는 1975년 광복 30주년에 즈음하여 3ㆍ1운동과 유사한 민중저항을 구상하면서 김대중ㆍ함석헌ㆍ홍남순 변호사 등과 만났다. 이것이 권력의 촉수에 잡히게 되고, 1975년 8월 18일 등산길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장준하가 30년 전 광복군 OSS 대원으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자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던 날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장준하는 일본군 출신들이 장악한 세상에서 의문사를 당하고, 아직도 정확한 배후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장준하의 생애는 민족자주독립과 민주주의, 통일조국건설이라는 신념과 실천으로 일관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독립군이 되고, 해방 뒤에는 민주주의 건설을 위하여《사상계》를 발행했다. 박정희를 누구보다 비판하면서도 7ㆍ4성명을 지지한 것은 민족통일의 기회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7ㆍ4성명을 파괴하면서 유신체제를 만들고, 김일성이 유일체제를 강화한 것을 지켜보면서 남은 생애를 민족통일운동에 바치기로 다짐했다.


 


나의 사상ㆍ주의 또한 지위, 나의 재산, 나의 명예가 진실로 민족통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분단체제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의 조국, 두 개의 국가 때문에 피해 받은 민중의 조국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두 개의 국가란 그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장악한 몇 사람의 것이요. 민중의 조국은 끝까지 하나이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장준하가 의문사를 당한 날 필자가 저녁 늦게 찾아간 면목동 전셋집 비좁은 안방에는〈일주명창(一注明窓)〉이란 휘호가 주인의 변고도 모르는 듯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심지 하나가 어두운 창을 밝히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다시 어두워졌는데 장준하 선생의〈일주명창〉이 새삼 그립다.


 


 


* 본문은 하단에 첨부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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