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최근 유럽 사민당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언론과 학계 그리고 정당관계자들의 다양한 시각에 따라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위기의 징후에 대한 진단에는 대체로 일정 부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도 간혹 유럽 사민당의 위기의 징후에 대한 진단들이 행해졌으나, 주로 단편적으로 다루어졌었다. 최근 이례적으로 언론과 학계를 중심으로 유럽 사민당의 위기에 대한 집중적인 재조명이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는 2009년 9월의 독일연방의회선거(Bundestagswahl, 이하 총선)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기록한 독일 사민당(SPD, 이하 사민당)의 위기상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9월에 실시된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은 23%라는 창당 이래 최악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불과 4년 만에 득표율이 11,2%나 하락하는 참담한 패배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선거에서 사민당은 전체적으로 약 620만 표를 잃었고, 2005년도 선거에서 사민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의 약 1/3이 이탈하는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사민당의 위기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은 사민당의 위기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만성적인 것으로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치달을 수 있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독일 사민당이 처한 위기의 본질이 단순히 인적ㆍ구조적인 차원을 넘어서 정책과 노선, 그리고 선거 캠페인 능력까지 포괄하는 총체적인 위기의 상황이어서 유럽연합 회원국인 다른 나라의 사민당 패밀리들보다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글은 첫째, 소위 유럽 사민당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전성기 이후 10여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유럽 사민당이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실권했고 지지기반은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며 위기라 불릴 만큼 크게 위축된 원인은 무엇이고, 둘째,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개혁사례, 특히 독일 사민당의 사례를 통해 최근 새롭게 출범한 민주통합당의 진로와 발전방향에 대한 유의미한 시사점을 도출하고자한다.
2. 사민당 위기의 원인
사회구조적 변동에 따른 전통적 지지기반의 약화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사회에서 진행된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개인주의 경향의 확산과 더불어 일련의 사회구조적 변동은 서비스 업종의 팽창 및 생산직 노동자의 감소 현상과 전통적인 사회-윤리적 하부집단(sozial-moralische Milieus)의 동질성 약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정당 핵심지지층의 규모가 축소되거나 이탈하는 유권자 부분재편현상(Partisan Dealignment)으로 이어졌다.
독일의 경우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와 사회구조적 변동으로 인해 가장 타격을 입은 정당은 기독교민주당(CDU, 이하 기민당)과 사민당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조합원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사민당은 핵심지지층이 급격하게 감소함에 따라 전통적인 강세지역이 해체되고 지지기반이 축소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원 수의 급감
독일 사민당의 하부조직기반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과정에 직면해 있다. 당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당원가입은 정체되어 연금수령자와 퇴직자 등 고연령의 당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 사민당은 1976년에 백만 명이 넘는(1,022,000명) 당원을 보유한 당원 중심 정당이었으나, 1990년에는 943,000명으로 감소했고, 2010년에는 502,062명으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30년 동안 당원의 절반을 잃어버린 셈이다.
당원 수의 감소 원인은 대체로 기성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과 실망의 결과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지만, 기존 정당구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당원들의 이탈이 심화되는 경향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감소요인으로는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의 경우에서 보듯 당 정책노선의 급격한 변화가 당원의 이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유권자들이 더 이상 기성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하려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이는 당원이나 지지자들이 당내 결정과정에 함께 참여해 토론하고 결정하며 조력할 수 있는 부분이 현저히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경향은 독일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크 등 다른 나라들에서도 나타난다.
모든 당원에게 당 대표를 선출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프랑스 사회당과 영국 노동당의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 유럽 사민당들에서는 당 대표를 선출하거나 정책노선의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 당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제한되어있다. 당내의 여러 단위들에서 실질적으로 참여해 활동하고 결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단지 대의원들에만 주어져 있다.
당원의 노령화
당원 수의 감소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당원 유입의 정체, 특히 젊은 유권자들이 충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속되는 당의 노령화는 구조적으로 당 조직의 학습능력 상실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사민당의 패밀리 중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당원노령화가 가장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독일 사민당의 당원현황을 보면 35세 이하의 당원은 약 10% 수준에 머물러 있고, 35세 이상 60세 이하 중간 연령층에 속하는 당원은 60세 이상 고연령층 당원에 비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당원 수의 감소 및 노령화의 결과 : 취약해지는 선거 캠페인 역량
선거 캠페인 능력의 관점에서 볼 때 독일 사민당의 조직 잠재력은 실제로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할 수 있는 당원들의 비율과 당 조직 및 구조 등의 전반적인 상황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정당의 선거 캠페인 능력은 당 조직의 지원체계와 당원의 적극적인 활동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2006년 말에 당 사무처에서 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사민당은 당시 전국적으로 9,300개의 당 하부조직 중 절반 이상이 약 50여 명 이하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중 200명 이상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조직은 단지 427개뿐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1,624개 지역조직에서 5년간 새로운 당원의 유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며, 동독지역에서는 겨우 25,000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어 서독지역과 비교할 때 당의 하부조직기반이 현저히 열악한 상황이다.
급격한 당원 수의 감소, 당원의 노령화 그리고 당 하부조직기반의 취약성 등으로 인해 사민당의 캠페인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적극적 참여 경향의 당원들과 광범위한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것이 당의 강점일 때도 있었으나, 더 이상은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잦은 지도부 교체로 인한 안정감 결여
독일 사민당은 슈뢰더 수상과 뮌테페링 전 당 대표 등 6ㆍ8세대들이 지난 25년 동안 당 권력의 중심에 있다가 정치무대에서 퇴장한 후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지도부의 잦은 교체가 진행되었다. 슈뢰더 정부 집권기간을 포함해 최근까지 지난 10여 년 동안에 여섯 명의 당 대표가 선출됐다. 잦은 당 대표의 교체는 필연적으로 당의 효율적인 기능과 일관된 정책추진을 어렵게 한다. 또한 당 지도부의 잦은 교체는 차세대 지도자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명백한 위기의 징후이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의 부재는 당의 선거 캠페인 역량의 취약을 동반하고, 필연적으로 정권창출의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신중도 노선의 결과 : 정체성의 혼란과 지지층의 이탈, 그리고 분열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적 핵심가치 중의 하나인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이상에서 출발한 독일 사민당의 역동성은 과거 당원과 지지자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사회정책 영역에서 능력과 권위를 인정받았었다. 그러나 게르하르트 슈뢰더 수상이 신중도(Neue Mitte) 노선을 표방하고, 2000년대 초 극심한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공공부분에 대한 투자 축소와 복지 축소, 세율 인하, 노동시장의 유연성 등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당원과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러한 반응은 조세개혁, 노동개혁, 연금개혁을 포괄한 슈뢰더 정부 2기의 대규모 개혁프로젝트인????아젠다 2010????의 추진과정에서 부정적 여론으로 확대되었다.
????아젠다 2010????의 주요내용 중 사회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하르츠 IV 법안이다. 이 법안은 실업급여와 실업부조를 통합해 실업수당 수급자격요건을 까다롭게 만들고 연차적으로 줄여 실업보조금과 영세민 보조금을 통해 최저생활비 정도만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이 법안의 의도는 실업자에게 일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일하지 않은 국민에게는 국가의 배려를 최소한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장기실업의 경우에도 비교적 높은 실업급여 때문에 실업자가 곧바로 빈곤층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지만 하르츠 IV 법안의 도입으로 인해 실업수당의 지급기간이 단축되고, 액수가 줄어들어 실업자들은 수당지급 기간 내에 저임금근로나 시간제근로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처럼 하르츠 IV를 둘러싼 논쟁이 격해지는 가운데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하르츠 법안과 관련해 실업자나 저소득층에 대한 정부 지원액이 너무 적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존엄성 있는 삶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련 법규를 올해 안으로 개정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 파장은 독일 전역을 휩쓸면서 마침내는 라이프찌히 월요시위가 부활되기도 했다.
하르츠 IV와 같은 노동시장개혁정책의 추진으로 실업자 및 사회적 약자층 등 국가부조 수급자들에게 대한 압박이 강화되는 상황은 사민당의 당원 및 지지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포함된 개혁정책은 과거 사민당이 사회적 약자들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했던 오랜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슈뢰더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항의해 전 당대표이자 이론가인 오스카 라퐁텐과 당내 좌파계열의 다수의 당원들이 탈당하게 되고, 2005년 총선을 불과 3달 앞두고 구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과 사민당을 탈당한 좌익계열이 창당한????노동ㆍ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이 합당해 좌파당(Die Linke)을 창당하게 된다.
좌파당의 출범과 함께 오스카 라퐁텐이 당 대표가 되자 사민당에 실망한 지지자들이 새로운 좌파정당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좌파당 지지로 선회한 과거 사민당 지지자 10명 중 6명이 사민당의 정체성 혼란을 정당지지의 변경사유로 들었으며, 그중 특히 실업자, 노동자, 노동조합원 등은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정당이 사민당보다 좌파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사회적 약자들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둘러싸고 사민당과 좌파당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독일 정당 지지율 변화 추이(1991.1-2011.12)
자료 출처 : Forschungsgruppe Wahlen E.V(2011.11)
2009년 총선에서 나타난 정당 간 지지자들의 이동상황을 보면 당시 사민당의 상황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사민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 중 110만 명은 좌파당, 87만 명은 녹색당, 88만 명은 기민/기사 연합, 53만 명은 자민당, 32만 명은 기타 정당에게 투표했고 200만 명은 기권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민당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이러한 선거결과는 슈뢰더 정부가 개혁정책으로 2003년부터 추진했던 아젠다 2010과 하르츠 IV 법안에 내재된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경직성과 그에 따른 정체성의 모순에 대한 거부의사가 명확히 반영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슈뢰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사민당의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졌고, 2009년도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투표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제도적으로 정당재편과 거대정당의 약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야기한 셈이다.
3. 총선 패배 이후 당 개혁 프로세스 및 혁신조치
당 개혁 프로세스
집권기간 동안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당 개혁은 완전히 새로운 토대 위에서 출발해야 했다. 당 개혁과 관련해 지도부의 정책구상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의 정의와 당헌당규의 개정에 국한되는 과거의 톱다운(Top-down) 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방식의 개혁이 추진되어야 했다. 과거의 실패사례도 있거니와, 이 같은 방법으로는 당의 의사소통구조나 일상적인 정치과정들이 개선되지 않은 채 피상적인 변화과정만 반복되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총선 패배 후 사민당의 개혁은 이러한 교훈에서 출발해 2010년 3월부터 5월까지 당의 하부구조인 지역위원회 또는 지역협의회의 당원들을 대상으로 당의 문제점과 당에 대한 요구사항을 묻는 설문조사에 착수했다. 당원 대상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 내부 상황에 대한 인식과 당 조직 활동의 현실을 바라보는 당원들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지역의 조직 상황과 관련해 대다수 지역의 하부조직들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당원과 당원의 노령화에 직면하여 이미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었으며,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소규모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당의 지역조직 중 약 40% 정도가 20명 이하, 약 1/3은 20명에서 50명 사이였고, 단지 23%만 50명 이상의 활동적인 당원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의 하부조직 중 그나마 활동적이라고 추정되는 53%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지도부회의를 개최하는 등 활력 있는 조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거의 60%에 가까운 지역의 하부조직은 지역 내의 노동조합, 사회단체, 그리고 시민단체 등과 실질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 하부조직의 설문조사에 이어 당 개혁조치의 다음 단계는 당 하부조직의 대표들이 참석해 설문조사의 결과에 대해 서로 공유하고, 토론과정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야 할 상위주제를 선정하고 추진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를 하는 것이었다. 2011년에 선정된 상위주제를 중심으로 열두 번의 현장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는 지역 하부조직의 대표, 개별 정책별 포럼, 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의 기관과 단체, 그리고 학계 인사들이 초청되어 자신들의 경험과 구상, 그리고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현장토론에서 제기된 제안과 주장들을 보다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당헌의 수정범위와 수정이 필요한 구체적인 조항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서 네 번의 지역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사민당은 당 하부조직의 적극적인 참여욕구와 당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당 개혁의 일환으로 시민들에게 당을 개방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미래의 사회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기 위해 비당원 시민들을 초대해 일곱 차례의 시민정당회의를 개최했다.
다양한 혁신조치
최근 유럽의 정당들은 당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외부의 관심 있는 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당을 개방하는 개혁조치들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독일 사민당이 최근 개최된 전당대회에서????더 많은 민주주의????와????중도좌파????노선의 선언을 하고 과거 집권기간 동안 왜곡된 정책 프로그램의 혁신과 더불어 당의 의사형성과 결정과정에 당원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고 권한을 강화하는 것을 당이 지향해야할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것도 이러한 추세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 많은 당내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로 선출직 대의원만 참석해온 기존의 대의원대회 대신에 전 당원이 참여하는 당원대회를 통해 당론을 확정하는 방식으로 당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정책결정 시 당원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조직단위에서 당원을 통한 정책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향후에는 우편투표와 온라인을 통한 당원의 정책제안이나 발의가 가능하도록 법적ㆍ기술적인 조치들을 보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지역의 사회민주주의 공동체를 강화하고 지원하기 위해 도시지역, 마을공동체, 지역협의체 등의 각 지역의 사회민주주의 활동가들에게 전당대회에서 발언권과 의안의 제출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을 당규에 포함시켜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제도적인 지원을 통해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연대 파트너들과 실질적인 협력관계를 맺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한 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지자들을 획득하고 정치적인 목표와 전략에 대해 사전에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독일 사민당은 연대파트너인 노동조합, 시민단체, 교회, 종교단체 관계자들을 초청해 그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구하고 있으며, 연대 파트너들에게 사민당의 각종 회의에서 강화된 의제 제안권과 발언권한을 보장해주기 위해 제도적 장치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는 개혁조치들 중 가장 혁신적인 조치는 당적이 없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당내의 다양한 의사형성 및 결정과정에서 당원과 함께 동등한 자격으로 조력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사민당은 당적을 보유하지 않은 시민들도 정책결정을 위한 설문조사에 참여할 수 있고, 당내의 개별 정책단위와 정책포럼에서 당원과 동일한 자격의 조력자가 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직업 특성상 이동이 잦은 젊은 유권자들을 위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정책포럼을 개설하고 당원자격이 유지가능 하도록 당헌을 개정하고, 온라인 아카데미 개설을 통해 젊은 유권자들의 참여를 활성화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개혁은 불가피하게 당 지도부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민주적 절차라는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 간 독일 사민당을 포함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은 이 같은 경향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2009년 독일 총선 패배 직후 학계와 언론계의 사민당에 대한 장기적인 침체 가능성에 대한 진단은 이러한 불충분한 개혁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단은 아직 이른 것처럼 보인다. 과거 사민당은 역사 속에서 다시 회생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과거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당 조직의 개혁 등의 소기의 성과로 인해 당 지지율이 점차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 사민당이 정책쇄신과 당 개혁 프로그램 등 자기혁신에 성공한다면 과거의 명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닐 것이다.
4. 민주통합당에의 시사점
지금까지 독일 사민당을 포함한 유럽 사민당의 위기상황과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서로 다른 역사인 배경과 정치문화 경제ㆍ사회ㆍ문화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민당의 위기와 위기극복 사례에서 민주통합당의 진로와 향후 전략적 과제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당의 하부조직 단위가 생동감 있는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정비와 더불어 시민들도 당 운영 및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열린정당화를 지향해야 한다. 당의 하부조직과 지역의 우호적인 연계조직,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당원, 그리고 지지자들은 정당으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매우 소중한 자원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지역민들과의 실질적 접촉과 정치적 설득과정이 이루어지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당원과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 단지 대중언론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유권자를 설득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오바마 후보의 성공적인 캠페인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언론보도의 중심을 장악하는 중앙당의 고공전(Air War)과 당 하부조직단위의 연계조직과 활동적인 당원들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유권자들과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대화 등을 통해 지상전(Ground War)을 전개하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선거승리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지역 하부조직의 활성화와 당원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조치로서 당원의 권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당원의 유형을 다양화하고 차별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다만 개별 유형에 따른 당원 권한의 차이는 최소화 하면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당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역의 하부조직단위의 대표를 선출하거나 또는 공직후보자 선출 시 특정 배수의 후보군 추천과 확정권한을 부여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안이다. 또한 당 조직구조상 하부단위에서부터 다양한 분야의 정책포럼이 결성되고, 그 정책포럼의 개별 영역에 모든 당원이 빠짐없이 분산 배치되어 시민들과 함께 토론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는 당원 주도의 풀뿌리 생활정치가 정착되어야 한다.
둘째, 선명한 정체성과 노선은 당원의 단결과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독일 사민당의 교훈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가치의 추구, 즉 정체성과 노선이 당원과 잠재적 지지층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새로 출범한 민주통합당은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현 집권여당인 한나라당과 통합진보당과의 경쟁구도 속에서 차별화된 노선과 선명한 정책, 그리고 진정성 있는 정치행위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획득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주통합당이 이전의 민주당보다 진보적 색채가 훨씬 뚜렷해진 강령과 정책을 내놓은 것은 한편으로는 과거 민주당의 사회적 약자와 서민층, 그리고 노동자들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전통적인 가치를 계승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된 시대정신에 부합한 바람직한 조치로 매우 다행스럽고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새로운 강령과 정책이 말뿐인 정치적인 수사나 구호에 그치지 않고 그에 부합한 정치적 행태와 실천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그 진정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표나 최고위원 등 당의 지도자는 개인의 정치적인 목표보다 당의 진로와 발전방향에 대한 고민이 앞서야 한다. 정당의 신뢰가 지도자의 신뢰보다 더 중요하다. 지도자의 개인적 지지가 당의 지지로 이어지는 것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오히려 당의 신뢰가 지도자의 신뢰로 이어지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현상이다. 지도자의 이미지 속에 당의 이념이나 정책노선 등이 투영되어 구체화될 때 그 지도자는 가장 매력적인 정치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지도자는 정당의 정책적 가치나 이상의 가장 적절한 수호자이며 가장 효과적으로 그 정책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민주통합당은 유능한 정당, 집권능력이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당면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미래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오늘날 선거에서 이슈는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유권자들의 투표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 각 정당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이슈가 언론의제로 채택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 이슈를 둘러싼 논쟁이 선거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 자신들의 강세영역이거나 타 정당들에 비해 문제해결능력에 있어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어 유권자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정책 영역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년 두 차례의 선거를 앞두고 아젠다 선점을 위해 정책의 이해당사자 또는 집단의 정책수요도, 만족도, 체감효과, 그리고 우선순위 등을 실시간 점검하고 피드백 할 수 있는 의제관리시스템을 당내에 구축해야 한다.
다섯째, 지속적인 자기혁신, 사회의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 새로운 요구에 신속하게 반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유럽 사민당의 경우처럼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 등 비교적 규모가 큰 정당들은 거대한 조직의 특성상 종종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와 그 변화에 따른 정치ㆍ사회적 파급효과에 대해 둔감하거나, 설사 나중에 깨달았다 할지라도 너무 늦게 반응해 당원이나 지지자들이 이탈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따라서 당 부설 연구원 또는 외부의 학계나 연구기관과의 공동연구 등을 통해 경제ㆍ사회ㆍ문화적 변동에 따른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태도의 변화 등에 대한 중장기적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되어야 한다.
결국 민주통합당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민생의 중심에 위치하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하며, 당원과 새로운 지지자들을 움직이게 하고, 과거와 다른 수평적인 의미의 새로운 정치 참여 가능성을 제공하고, 모든 영역에서 살아있는 정당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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