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극화와 소득 불평등 해소라는 난제
지금 세계경제와 한국경제 앞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난제가 가로막고 있다. 첫 번째 난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심화된 소득 불평등을 어떻게 완화시키면서 지금의 경제 위기 국면을 탈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아가 우리 경제를 다시 안정적인 성장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에 맞서는 99%저항운동에 나섰던 월가 점령운동에 대한 전 세계적 호응을 보건데,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소득 불평등은 이미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난제는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 성장체제가 명확한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미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2007년 경기침체 이후 5년이 지나도록 경제가 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와 확실한 회복을 도모할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성장 동력이 효력을 다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가 기존의 성장체제를 폐기하고 신자유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성장모델, 성장전략을 찾아야 함을 말해준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악화된 소득 불평등과 파국에 몰린 신자유주의 성장체제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외형적으로는 규제 풀린 금융과 위험한 파생상품 거래가 2008년 경제위기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성장체제 자체가 악화시킨 소득 불평등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아직도 경제가 제대로 회복되지 못한 채 번번이 위기가 재발하는 것도 실업 개선이 극히 부진한데서 알 수 있듯이 소득 불평등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수준의 소득불평등 개혁 없이 자본주의 위기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1990년대 미국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다. 라이시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상위 1%로 소득이 집중되었을 때 발생했으며, 반대로 자본주의의 안정적 발전과 성장은 소득 격차가 낮아졌을 때 실현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총 소득 중 상위 1%에게 돌아간 몫이 1928년과 2007년 둘 다에서 23퍼센트를 넘으면서 최고치에 달했다는 것이다.([그림 1] 참조)
이 점에서 보면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소득 불평등은 경기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북미와 유럽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성장세가 나은 아시아에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결국 심화되는 소득 불평등과 기존 성장체제의 한계라는 당면한 한국경제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한국경제의 2013년 체제를 준비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기존에 한국경제를 추동해왔던 성장체제를 세계 경제적 범주에서 다시 조망해보고 그 한계를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동시에 기존 성장모델을 뛰어넘기 위해서 가장 유력한 대안체제로 제기되고 있는 소득주도 성장전략을 제안해볼 것이다.
2. 신자유주의 두 가지 성장모델
우리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전면적으로 수용되었지만, 이미 1980년부터 미국과 영국에서 확립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자본 활동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책면에서 규제완화와 감세를 함으로써 자본으로 하여금 투자를 촉진하자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투자가 촉진되면 고용도 늘어날 것으로 보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가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론적인 신자유주의 논리였다. 이명박 정부의 성장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확신했던 투자 촉진은 대체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가 추진했던 금융 규제완화로 자본시장이 팽창하면서 투자자의 단기 수익추구 요구에 의해 기업 이윤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배당 몫이 팽창하거나 주가관리 비용으로, 또는 실물이 아닌 금융 자산투자로 이윤의 상당부분이 돌려졌다. 결국 적하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가 이처럼 자본의 이윤주도 성장(profit-led growth)을 추구했기 때문에, 설비 투자를 위한 이윤 몫 확대가 우선이었고 이를 위해 노동자의 임금은 줄여야 할 비용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신자유주의는 임금 상승 억제를 추구했고 이를 위한 포괄적 정책이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따라서 임금인상 → 소득증대 → 총수요 확대 → 설비투자 확대라고 하는 연쇄 효과는 처음부터 작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규제완화, 감세, 임금인상 억제를 통해 최대한 자본의 이윤 몫을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로 연결되는 선순환을 만들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실제 신자유주의가 작동시킨 경제 발전모델, 성장 모델은 무엇이었을까.
신자유주의 시대에 현실에서는 두 개의 불균형 성장과정이 있었다. 하나는 신용주도 성장(credit-led growth), 금융주도 성장(finance-led growth), 또는 부채주도 성장(debt-let growth)이다. 이것은 임금상승 억제 → 소득 불평등 → 국내적 수요 부족 → 외국자본 유입과 신용팽창 → 부채에 의한 소비의 경로를 밟게 된다. 선진국에서는 영국과 미국이 대표적이고 유럽을 위기에 몰아넣은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이 포함된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이윤을 투자로 연결시키는 견고한 성장경로를 밟는 대신에, 금융거품이나 부채증가(신용주도성장)로 빠져들게 된다. 증권시장이나 자산시장에서의 거품형성과 붕괴의 순환, 또는 자본유입 등이 실제로 동작했던 신자유주의 핵심적인 양상이었다. 1980년대 남미위기, 1990년대 중반 멕시코 위기, 1992~1993년 유럽 통화위기(European Monetary System), 1997~1998년 동남아시아위기, 2000~2001년 닷컴 버블, 그리고 최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모두 그렇다.
임금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발생했던 소득 불평등에 대해서 미국의 경우 유럽처럼 세금을 걷어 소득 재분배를 시행하고 복지를 확대하는 정책을 신자유주의는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에 “소득 불평등 심화 대응책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저소득 가구에 대한 신용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 대응책이 주는 소비증대와 고용 증가 효과는 바로 나타나는 반면 이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미래로 미룰 수 있다.”
“가계 대출 확대야말로 여러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정치인들은 믿었다. 가계 대출을 확대하게 되면 집값이 상승하고, 집값이 상승하면 국민은 자신들이 더 부자가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민의 소비가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이다. 가계 대출 확대는 금융 산업 뿐 아니라 부동산 중개업, 주택 건설 분야의 수익과 고용증대를 가져오는 효과도 유발할 것이다.”
또 하나는 순 수출을 중심적 성장엔진으로 하는 수출주도성장(export-led growth)이었다. 이것은 임금상승 억제 → 소득 불평등 → 국내적 수요 부족 → 순 수출(수출 - 수입) 확대와 자본 유출의 경로를 보여준다. 선진국에서는 독일과 일본, 오스트리아, 그리고 발전도상국에서는 중국이 대표적이다.
한편으로 미국과 같은 앵글로 색슨 국가들에서 가계부채 급증으로 민간소비가 늘어 경제가 성장하고, 다른 나라들은 내수를 억제하면서 핵심 성장엔진으로서 순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해왔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신자유주의 금융자유화가 ‘서로 공생하는’ 두 개의 성장모델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중국이나 독일처럼 수출주도 성장모델 국가들이 경상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자본을 해외로 유출시키면, 대체로 경상수지 적자 국가들이었던 부채 주도 성장 국가들은 해외 자본을 유입시켜왔던 것이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낳은 두 개의 성장모델은 모두 임금인상 억제와 그로 인한 소득 불평등, 내수 약화라고 하는 동일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모든 국가들이 두 개의 성장모델에 이분법적으로 딱 맞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개의 성장모델은 국제적 불균형이 심화된 배경의 동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임금 억제로 인한 내수 결핍상황에 어떻게 서로 다르게 대응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둘 다 지속 가능한 성장모델이 아니다. 금융거품은 터지게 되어 있고 가계부채는 상환을 해야 한다. 수출주도형 성장은 다른 국가들의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는 수입 국가를 피폐하기 만들고 국제적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3.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성장모델
그렇다면 한국의 성장모델, 발전모델은 어떤 것이었나? 확실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수출주도형 성장 모델이었다는 것이다. 국내적 저임금에 기초한 아시아 발전도상국의 전형적 패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과 성장 방식은 상당한 변형을 받는다.
신자유주의 자본시장 개방과 금융 자유화가 전면적으로 확대되고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주주가치 경영이 기업 속에 파고들게 되었다. 그 결과 노동시장 유연성이 확산됨에 따라 비정규직 확대와 고용불안, 그리고 소득 불평등 확대가 구조화된 것이다. 특히 은행이 수익추구경쟁 대열에 합류하면서 소매금융에 주력하게 되다.
이때부터 가계부채가 급등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적 부채주도 성장모델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한국의 가계부채 비중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50.2%에서 2011년 무려 89.2%까지 증가했다. 무려 39%가 추가로 늘어난 것이다. 경제성장에 따라 가계부채 절대 규모가 증가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경제규모보다 훨씬 빠르게 가계부채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2000년에서 2008년 사이의 부채비율 증가를 보면 한국은 29.7% 늘어났는데, 이는 부채로 성장한 전형적인 선진국인 미국보다도 높은 수치이며 지금 위기를 겪고 있는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와 유사한 정도다.([그림 3] 참조) 2012년 현재 1,000조가 넘는 가계부채는 어느새 우리경제의 최대 위험요인이자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시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국가의 전형적 성장 모델인 부채주도 성장을 해 왔던 국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경상수지 적자 국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외환보유고가 쌓여 나가는 전형적인 수출주도형 국가이기도 했다. 심지어 2007년 기준 경상수지 흑자는 GDP대비 2%였지만 경제위기가 한창인 2009년에는 무려 4%가까이 올라갔다. 2011년에도 2.4%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전형적 수출 주도형 국가들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과 이런 점에서 닮았다.([그림 3] 참조)
결국 우리나라는 독특하게도 내수시장은 가계대출을 늘려 소비하고 부동산 투자하는 부채주도형 성장의 길을 가면서, 동시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수출을 늘려 무역 비중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독일조차 압도하는 90%이상(GDP대 비)을 차지할 정도의 수출 주도형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 국민들의 소득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고 동시에 소득 불평등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4. 소득주도 성장 모델이 내수기반 경제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에서 작동하던 부채주도 성장, 수출주도 성장 모델도 모두 한계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우선 부채주도 성장모델이 이미 임계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가처분소득의 150%가 넘을 정도로 커진 가계부채 1,000조 원은 가계의 소비여력을 제약할 뿐 아니라 현재 통화와 금리정책, 부동산 정책 등 모든 정책 수단들을 제약하고 있다. 불패 신화의 부동산 시장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4년 이상 실질적으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민간소비 성장률이 경제 성장률을 훨씬 밑돌고 있는 이유다.
아직은 중국의 탄탄한 성장세에 힘입어 대기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모델은 작동
되고 있고 이것이 2008년 금융위기에서 한국경제가 그럭저럭 견디게 해주는 지탱점이다. 그러나 이 역시 두 가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첫째는 수출주도 성장의 국내적 확산 효과가 매우 미약하다는 점이다. ‘부자 삼성, 가난한 국민’은 이를 상징하고 있고 최근 재벌대기업에 대한 분노가 커지는 이유다. 둘째는, 세계경제위기의 지속과 환율전쟁 우려 등으로 과도한 수출의존 국가들에 대한 경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경제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득 불평등 문제로 돌아가서 국민경제 총 수요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주는 가계에 대해 소득이라는 ‘성장 연료’를 주입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내수와 수출의 동시 위축이라는 총수요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새로운 경제체제로의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새로운 성장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과제가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는 해결책이 바로 생산성과 실질임금의 동반성장 전략이다. 다시 말해 소득주도 성장전략(Income-led Growth Strategy)이다.
소득주도 성장전략은 후기 케인지안(Post-Keyensian)과 칼레키안(Kaleckian) 성장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최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7)와 국제노동기구(ILO)8)에서도 소득주도 성장전략을 신자유주의 성장 패러다임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소득중심 성장전략의 핵심은 실질임금과 생산성 증가의 상관관계를 회복 하는 것이다. 생산성 증가에 상응하는 만큼 실질임금을 증가시켜 노동소득 분배율을 유지하고 거시경제의 균형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한다. 소득을 통해 총수요를 극대화하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수 있도록 분배율을 관리한다.
다만 재벌개혁과 복지지출 확대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분배율을 개선시켜 내수를 자극하는 성장전략이다.([그림 4] 참조)
소득주도(income-led)란 이름은 지난 시기 부채, 거품, 수출을 성장의 주요 추동 요인으로 삼았던 신자유주의 경제의 특징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득주도 성장전략이 실질임금 상승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한다거나 수출을 홀대한다는 편향적 인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과도한 수출주도에 따른 내수와 수출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대외취약성과 불안정 요소를 극복하면서도 중국효과와 남북경제협력을 통한 대외수요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수출과 내수의 균형 성장전략이다.
임금주도 성장전략은 노동친화적인 분배정책, 사회정책, 노동시장정책과 결합되어야 하고 금융부문에 대한 규제가 병행되어야 한다. 임금 몫을 증가시키고 최저임금을 제도화하여 임금격차를 감소시키는 분배정책, 사회 안전망을 강화시키고 노동조합의 법적 권리를 개선하며 단체교섭 적용범위를 확장시키는 정책들이 필요하다. 특히 강조할 점은 소득주도 성장전략의 현대적 버전은 금융부문의 재구조화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금융부문의 규제완화는 투기적 성장을 초래하고 1930년대 이래 최악의 경기침체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위기가 재발되는 것을 막고 싶다면 국제적 자본유입을 통제해야 하며 위험한 금융혁신을 규제하고 금융 거래세 등을 통해 훨씬 더 재정적 기여를 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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