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역사관

“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항상 인내하고, 우리가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자. 그래서 사랑하는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
공주의 섬, 하의도
김대중은 1924년 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마을 ‘후광’을 평생 아호로 삼을 만큼 고향을 사랑했다. 수평선, 파도, 물새, 바람과 햇살은 그에게 꿈과 용기 그리고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뭍으로 옮겼고,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 (현 전남제일고등학교)를 1943년에 졸업했다.
청년 김대중
김대중은 곧바로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1945년에 그는 해운업계에 널리 알려진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는 정계에 뛰어들었다. 청년 김대중이 정치에 뛰어든 것은 6.25전쟁과 부산정치파동(釜山政治波動)을 겪으면서 올바른 정치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자로 군림하고,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자 부패한 정권과 싸울 것을 다짐했다. 1957년 김대중은 가톨릭 영세를 받는다. 영세명은 토마스 모어이다. 신앙은 그가 겪게 될 고난의 역정에서 의지가 되었고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게 했다.
국회의원 그리고 이희호 여사
정치는 그에게 숱한 좌절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세 번 연속 떨어졌다. 그리고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민의원에 뽑혔지만 당선 3일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세력은 국회에 못질을 했다. 그는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암울했지만 그때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난 것은 한줄기 빛이었다. 1963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의정활동은 눈부셨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찾는 의원이었고, 금융, 건설, 외교, 예산, 국방등 다양한 상임위원회 활동을 펼치며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통일로 가는 길을 거침없이 설파했다. 본회의 최장시간 발언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점차 국민들에게 철학과 소신을 갖고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는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6.25전쟁 때 공산군에 붙잡혔다가 총살 작전에 목표교도소를 탈출했고(1950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후보 지원유세 차량을 타고가다 교통사고를 가장한 테러를 당했고(1971년),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당해 호텔에서 토막살해를 당할 위기를 넘겼고, 또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 극적으로 생환하였다(1973). 또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세력의 군사재판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980년). 불온한 세력과 그들의 하수인들은 그를 끊임없이 협박하고 회유했다. 그렇지만 김대중은 불의에 꺾이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다.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
민주화와 인권, 평화통일의 길을 선택한 그는 숱한 투옥, 망명, 연금을 당했다. 늘 죽음의 위험이 따라다녔지만 그는 이를 모두 이겨냈다. 사람들이 김대중이란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재야인사, 동교동, DJ로 불려야했다. 그의 호칭도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반란의 수괴, 용공 분자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김대중은 여러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고, 안드레이 사하로프, 레흐 바웬사와 함께 세계 3대 인권수호자로 지구촌의 존경을 받았으며,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김대중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고, 한국의 민주화는 김대중과 함께 전진하였다. 연금과 투옥 등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박해가 가해졌지만 김대중은 그 시간들을 분노하거나 아파하면서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역사, 철학, 경제, 문학서적 등 수 백 권의 책을 정독했다. 그러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그가 읽은 책의 목록을 보면 깊고도 넓은 책 읽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고비마다 그를 바르게 이끌었던 통찰력과 판단력은 옥중에서의 독서와 묵상을 통해 길러졌는지도 모른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명의 위기에서도 그는 내일을 준비했다.
제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여러 권의 책을 썼다. 80년 사형선고를 받고 가족에게 보낸 '옥중서신'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었다. ‘대중경제론’, ‘3단계통일론’,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등은 그의 깊은 사색과 탐구의 결과물이다. 13대, 14대 대통령선거에 낙선했지만 1997년 마침내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건국 이후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쾌거였다. 그것은 민주화 세력의 승리요, 국민의 승리이기도 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취임하자 자신을 그토록 핍박했던 독재자와 군사 지도자들을 용서했다. 이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용서했으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감옥에서 꺼내주었다. 용서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줬다. 1980년 11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항상 인내하고, 우리가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자. 그래서 사랑하는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

외환위기 극복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한국은 사상초유의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에 직면해 있었다. 고속성장의 온갖 부작용이 한국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일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관치경제에 대수술을 단행했다.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누구라도 맞았고 누구라도 찾아갔다.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 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굴욕적인 IMF체제를 벗어났다. 세계는 한국을 경제우등생, 모범국가로 불렀다.
대통령 김대중은 경제위기의 와중에서도 전국에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하고 범국민적 정보화 교육을 추진하여 한국을 세계 선두의IT강국으로 이끌었다. 민주화운동보상법, 의문사진상규명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각종 민주화 입법을 추진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확고히 뿌리 내리게 했다. 한국은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주의·인권 국가가 되었다. 기초생활보장법을 핵심으로 하고 중산층의 안정을 도모하고 중학교 3년까지 무상의무교육을 완성한 ‘생산적 복지’ 정책은 그의 저술 ‘대중경제론’의 경제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의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55년 만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그의 햇볕정책은 남과 북의 미움을 녹여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평화의 기운이 움트게 만들었다.
노벨평화상
그 해 12월 김대중은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과 버마, 동티모르 등 아시아의 민주화 인권을 신장시키고 남북화해정책을 펼친 공로가 수상 이유였다. 2003년 김대중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그가 진정으로 봉사하고 섬겼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속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위해 마지막 헌신의 촛불을 켜고 기도하며 행동하는 양심의 본을 보여주고 있다.

출생과 성장
- 1924.1.8
전남 무안군 (현재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부친 김운식(金云式), 모친 장수금 (張守錦)의 사이에서 태어나다. 부친이 1924년 1월 16일자로 출생등록을 하였으나, 1943년경 일제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하여 이 내용이 김대중의 공식적인 생년월일이 된다.
- 1933
초암(草庵) 김연(金鍊)으로부터 서당에서 한학 교육을 받다.
- 1934.5.12
4년제인 하의공립보통학교에 2학년에 편입하다.
- 1936.9.2
상급학교 진학을 위하여 목포로 이사하여 목포제일공립보통학교(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로 전학하다.
- 1939.4.5
목포공립상업학교(5년제, 현 전남제일고등학교의 전신) 수석으로 입학하다.
- 1943.12.23
목포공립상업학교 졸업하다. 원래는 1944년 초에 졸업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전시특별조치로 인하여 졸업날이 앞당겨지다.

청년 사업가 시절
- 1944.5
목포상고 졸업과 함께 목포상선회사에 취업. 이후 회사 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등 청년 사업가로 활동하다.
- 1945.4.9
차용애(車容愛) 여사와 결혼, 슬하에 홍일, 홍업 두아들을 둠
- 1934.8.19
8.15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다.
- 1946.2
목포 신민당 지부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여 탈퇴하다.
- 19347.2
50톤급 선박 1척을 구입하여 '목포해운공사'라는 회사명으로 연안 해운업을 시작하다.
- 1948.후반
상호를 '동양해운'으로 변경하다. 사업이 번창하여 한국전쟁 직전에는 70톤급 2척, 50톤급 1척 등 3척의 선박을 보유하다.
- 1950.6.25
사업관계로 서울 출장 중에 6.25를 맞다. 8월 10일경 걸어서 목포로 귀가하다
- 1950.9.28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에 탈출하다.
- 1950.10
선박 2척을 수리하면서 사업 재개를 준비하다. 또한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2년 3월까지 사장으로 재임하다.
- 1950.11
해상방위대 전남 지구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1951년 10월까지 활동하다. 주로 한국군의 군수 물자를 해상으로 운송하는 업무를 수행하다.
- 1951.3
동양해운'을 '목포상선주식회사'로 상호 변경하다.
- 1952.5.25
부사 정치 파동이 발생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독재 미주화를 위하여 정계 진출을 결심하다.
- 1952.7
해운회사를 부산으로 옮기로 '흥국해운주식회사'로 상호 변경하다. 일본에서 중고 선박 3척을 추가로 도입하여 사업을 확장하다.
- 1954.4.21
대중(大中)에서 대중(大仲)으로 개명하다. 원래 할아버지가 대중(大仲)으로 작명해 주었으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과정에서 대중(大中)으로 기록되었고, 차후에 이 사실을 알고 1954년 4월에 대중(大仲)으로 호적을 정정하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 다시 대중(大中)으로 정정하다.
- 1954.5.20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목포에서 출마해 낙선하다.
- 1955.4
서울로 상경하다. 이후 한국노종문제연구소 주간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다.
- 1955.10.1
『사상계』10월호에 「한국 노동 운동의 진로」를 기고하다
- 1956.6.2
명동성당 노기남 대주교실에서 길철규 신부의 집전으로 영세를 받다. 대부는 장면 박사이며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이다.
- 1956.9.25
민주당에 입당하다. 장면 박사의 지도 하에 민주당 신파로 활동하다.
- 1958.4.8
강원도 인제 선거구의 민주당 민의원 입후보 등록하다. 그러나 자유당의 방해 공작으로 등록이 무효되어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다.
- 1959.3.11
민의원 선거 등록 무효와 관련하여, 대법원에 제소한 '선거 무효 및 당선 무효 확인 소송'에서 승소함에 따라, 인제 지역구의 민의원 선거 결과가 무효로 결정되다.
- 1959.6.5
제4대 민의원 선출을 위한 강원도 인제 재선거에 출마해 낙선하다.
- 1959.8.28
차용애 여사가 병사하다.
- 1960.9
민주당 대변인으로 임명되어 8개월 동안 활동하다.

국회의원 시절
- 1961.5.13
강원도 인제에서 5대 민의원 보궐선거 출마해 당선되다. 네 번째 도전에 성공하였으나 5.16 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하다.
- 1962.5.10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재혼, 슬하에 홍걸을 두다.
- 1963.7.18
민주당 재건에 참여, 대변인이 되다.
- 1963.11.26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목포에 출마해 당선되다.
- 1964.4.20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 진행 발언을 하다.
- 1965.5.3
민중당이 창당되다. 민중당에서 대변인과 정책심의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하다.
- 1965.2.7
신민당이 창당되어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 1967.5.15
첫 번째 저서 ‘분노의 메아리’를 출간하다.
- 1967.6.8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의 집중적인 ‘김대중 낙선전략’에도 불구하고 목포에서 당선되다.
- 1969.7.19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3선개헌 반대 시국 대연설회에서 "3선 개헌은 국체의 변혁이다"를 제목으로 연설하다

대통령 후보
- 1970.1.24
신민당 7대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 선언하다.
- 1970.9.18
『내가 걷는 70년대』를 출간하다.
- 1970.9.29
신민당 전당대회 후보 경선에서 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다.
- 1970.10.16
대통령 후보 기자회견을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미·소·중·일 4대국 보장, 비정치적 남북교류 허용, 평화 통일론, 예비군 폐지'를 제창하다.
- 1971.2.3
미국 방문 중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다.
- 1971.3.13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을 출간하다.
- 1971.4.18
장충단 공원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를 개최하다.
- 1971.4.27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46퍼센트 득표)하다.
- 1971.524
8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 후보 지원 유세차 지방 순회 중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다.
- 1971.5.24
8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다.
- 1972.5.10
어머니 장수금 여사 사망하다.

유신시대 1- 동경납치사건
- 1972.7.13
7·4남북 공동 성명 발표 후 외신 기자 회견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제창하다.
- 1972.10.18
신병 치료차 일본 체류 중 유신 선포를 듣고 유신 반대 성명을 발표한 후 망명생활을 시작하다.
- 1972.10~1973.8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유신 반대 활동을 전개하다.
- 1973.6.28
『독재와 나의 투쟁』일본어 판을 출간하다.
- 1973.8.8
도쿄 납치 살해 미수 사건' 발생,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일본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납치 당해 수장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생환하다.
- 1973.8.13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으로 귀환하다. 귀국하자마자 가택 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다.
- 1974.2.25
아버지 김운식 옹 사망하다.

유신시대 2- 명동 3.1 민주구국선언
- 1978.8.22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반독재 선명야당 체제’의 구축을 위해 김영삼 총재의 당선을 적극 지원하다.
- 1974.11.27
가택연금 속에서 재야 반유신 투쟁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다.
- 1976.12.13
선거법 위반혐의(63년 대통령 선거 관료)로 금고 1년형을 선고받다.
- 1976.3.1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하다.
- 1976.3.10
‘3·1 민주 구국선언’에 서명한 인사들과 함께 정식 입건되어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다.
- 1976.3.22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 정지 5년형이 확정되다.
- 1977.4.14
진주교도소로 이감되다.
- 1977.5.7
진주교도소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 단식투쟁을 하다.
- 1977.12.19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 수감되다. 얼마 후 교도소 때보다 제한(접견 차단, 창문 봉쇄, 서신 제한, 운동 금지)이 더욱 심하자 항의 단식하다.
- 1978.12.27
옥고 2년 10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 연금당하다.
- 1979.3.1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선생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주도, 공동의장으로 반독재투쟁에 앞장서 세 차례 연행되다.
- 1979.12.08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 사태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자택연금에서 해제되다.

광주민주화 운동과 사형선고
- 1980.3.1
사면 복권되다.
- 1980.3.26
YWCA에서 9년만에 대중연설을 하다. 그후 사회단체, 대학의 초청으로 전국 순회 시국강연을 진행하다.
- 1980.5.13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시국성명을 통해 학생 시위 자제 호소하다.
- 1980.5.16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공동기자 회견을 갖고, 시국수급 6개항(계엄령 해제, 정치범 석방, 정치일정 연내 완결 등)을 제시하다.
- 1980.5.17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로 동교동 자택에서 연행되다.
- 1980.8.9
군 교도소에 수감되다.
- 1980.9.11
'내란음모사건' 결심 공판에서 '용공분자와 제휴하여 정권 탈취를 기도'한 '내란음모' 혐의로, '국가보안법', '계엄법', ‘반공법', '외국환관리법' 위반에 따라 군 검찰로 부터 사형을 구형받다.
- 1980.9.13
'내란음모사건' 18차 공판에서 1시간 48분에 걸친 최후 진술을 하다.
- 1980.9.17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다.
- 1980.11.3
육군본부 계엄고등 군법회의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원심에서 결정된 형량대로 사형을 선고받다.
- 1980.11.6
이문영 등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11명과 함께 육군본부 계엄고등 군법회의의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하다.
- 1981.1.23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내란음모사건' 상고심에서 김대중이 제기한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하다. 그러나 1시간 뒤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우방 국가들과 본인의 탄원 및 국민 화합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특별 감형에 관한 건'이 의결되어 김대중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되다.
- 1981.1.31
육군교도소에서 청주교도소로 이감되다.
- 1981.11.3
수감 중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Kreisky)인권성’을 수상하다.
- 1982.3.2
무기형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다.
- 1982.12.16
청주교도소 복역중 서울대학병원 12층으로 이감되다.
- 1982.12.23
2년 7개월의 옥고 끝에 형집행정지 석방. 가족과 함께 신병 치료차 미국 워싱턴으로 출국하다.

미국 망명생활
- 1983.1.8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월세 아파트에 일가족이 정착하다.
- 1983.1.31
『뉴스위크』지 회견,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다.
- 1983.2
미국 방송, 신문, 잡지 회견, 교민초청행사 참석하다. 재미 ‘한국 인권문제연구소’ 창설, 교포사회의 모국 민주회복 운동 주도하고, 망명중 미국 학계, 종교계, 사회단체들로부터 초청 강연을 하다.
- 1983.5.16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다.
- 1983.7.28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립하다.
- 1983.7
워싱턴, 뉴욕 등에서 김영삼 단식투쟁 지원 데모를 하다.
- 1983.9
미국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CFIA)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이듬해 논문 「대중 참여 경제론(Mass-Participatory Economy)」을 제출하다.
- 1983.12.23
옥중서신을 묶은 ‘민족의 한을 안고’를 출간하다.
- 1985.2.8
망명 2년 3개월만에 당국의 반대와 주위의 암살 걱정을 무릅쓰고 귀국하다. 김포 공항에서 대인접촉이 봉쇄된 채 격리,가택연금에 처해지다.

민추협 활동 / 대통령 출마
- 1985.2~1987.6
수시로 가택연금에 처해져 총 55회의 가택연금을 당하다.
- 1985.3.6
정치활동 규제에서 해금되다(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 등 16명). 그러나 사면 복권이 안돼 여전히 정치활동을 금지당하다.
- 1985.3.18
김영삼씨와 야권 통합을 합의하고 민추협 공동의장직을 수락하다.
- 1985.6.17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과 민주화 요구 공동 발표문을 채택하다.
- 1985.11
『대중경제론』(영어판), 『행동하는 양심으로』를 출간하다.
- 1986.2.12
신민당 민추협 중심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청원 1000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하다.
- 1986.11.15
전두환 정권이 자진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대통령 선거 출마하지 않을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다.
- 1987.4.6
김영삼씨와 신당 창당을 선언하다.
- 1987.4.8~6.25
78일간 가택연금에 처하다.
- 1987.7.10
민정당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 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전원과 광주민주항쟁 관련자 15명 등 모두 2300여 명과 함께 사면 복권되다.
- 1987.7.8
16년만에 광주를 방문해 망월동 묘역에 참배하다. 28년만에 고향인 목포와 하의도를 방문하다.
- 1987.10.27
미국 최대 노조인 산별노조총연맹(AFL-CIO)에서 수여하는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을 수상하다.
- 1987.11.12
평화민주당 창당,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 및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다.
- 1987.12.16
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다.

평화민주당 시절
- 1988.4.26
제 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다.
- 1988.5.18
야 3당 총재 회담, 5共 비리 조사, 광주 학살 진상 규명 등 5개항에 합의하다.
- 1988.11.18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정권 찬탈을 위한 조작극이었음을 증언하다.
- 1989.8.12
서경원 방북 사건 관련 혐의로 강제 구인되어 심야 수사를 받고 불구속 기소되다.
- 1990.1.22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야합 반대 투쟁을 시작하다.
- 1990.7.27
평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선출되다.
- 1990.10.8
'지자제 실시, 내각제 포기, 보안사 해체'등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13일간 하다.
- 1991.4.9
평민당, 이우정 등 재야 구야권 출신 등을 영입해 신민주연합당(신민당)으로 창당하다.
- 1991.9.10
이기택 민주당 총재와 신민당-민주당 통합을 선언하다.
- 1992.3.24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하다.
- 1992.5.26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 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다.
- 1992.9.7
러시아 외무성 외교대학원에서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의 생성과 발전 원리에 관하여(1945~1991)」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 1992.12.18
제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하다.
- 1992.12.19
정계 은퇴를 선언하다.

제 15대 대통령 당선
- 1993.1.26
영국으로 출국, 케임브리지 객원연구원으로 연구활동을 시작하다.
- 1993.7.4
영국에서 귀국하다.
- 1993.12.10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를 출간하다.
- 1994.1.27
아시아의 민주화와 남북 통일을 연구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아태재단)을 설립하다.
- 1994.5.12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북핵해결을 위한 '일괄타결', '카터 방북'을 제안하다.
- 1994.9.20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설립, 상임공동의장에 취임하다.
- 1995.7.13
정계복귀를 선언하다.
- 1995.9.5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다.
- 1997.5.19
새정치국민회의 전당 대회에서 제15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다.
- 1997.10.27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다.
- 1997.12.18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다.

제 15대 대통령 시절
- 1998.2.28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에 취임하다.
- 1998.3.1
3.1절 기념사에서 남북 특사 교환을 제의하다.
- 1998.10.8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십을 위한 공동선언'에 합의하다.
- 1998.12.15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양국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지향적인 우호 협력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키로 합의하다.
- 1998.12.16
제2차 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동아시아 비전 그룹' 구성을 제안하다.
- 1998.12.29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를 합법화하다.
- 1999.7.4
필라델피아 자유 메달을 수상하다.
- 1999.11.23
민주노총을 합법화하다.
- 2000.1.12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다.
- 2000.1.15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 제주 4·3사건 진상규명법 등 3대 민주 개혁법을 제정하다.
- 2000.1.20
새천년민주당 창당, 총재에 취임하다.
- 2000.3.9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및 남북 간 화해 협력을 위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다.
- 2000.6.13~15
분단 55년만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다.
- 2000.6.26
국회, 헌정 사상 첫 인사 청문회를 개최하다.
- 2000.8.1
의약분업을 전면 실시하다.
- 2000.9.2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송하다.
- 2000.12.10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다.
- 2001.1.29
여성부가 출범하다.
- 2001.5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제정하다
- 2001.6.29
국세청, 『조선일보』·『동아일보』·『국민일보』는 법인과 함께 사주를 조세범 처벌법 위반협의로, 『중앙일보』·『한국일보』 ·『대한매일』은 주요 탈루 당시 대표이사와 함께 법인을 검찰에 고발하다.
- 2001.7
부패방지지법을 제정하다.
- 2001.8.23
당초 계획보다 3년 앞당겨 IMF를 종결하다.
- 2001.11.5
제5차 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동아시아자유무역지대(EAFTA) 창설과 민 ·관 합동으로 구성되는 '동아시아 포럼' 설치를 제안하다.
- 2002.1.14
낙동강, 금강, 영산강 특별법을 제정하다.
- 2002.2.20
부시 대통령과 경의선 남측 최북단 도라산역을 방문하다.
- 2002.7.11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여성인 장상 이대 총장을 총리로 지명하다.
- 2002.7.27
광주 망월동 5.18 광주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시키다.
- 2002.9.14
남북한 군 당국, 판문점 실무회담 통해 경의 ·동해선 연결 공사에 따른 DMZ 지뢰 제거 작업을 19일 동시 착수키로 합의하다. 휴전 이후 비무장지대가 처음으로 열리다.
- 2002.11.6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1,000만명 돌파 기념행사에 참석하다.
- 2002.12.13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군의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해 사과 전화를 받다.
- 2003.2.15
한 ·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서명식에 참석하다.
- 2003.2.24
제 15대 대통령 퇴임 후 동교동으로 돌아오다.

퇴임 이후
- 2003.5.10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심혈관 확장 수술을 받다.
- 2003.5.12
세브란스 병원 입원 중에 처음으로 신장 혈액 투석을 받다.
- 2003.5.27
제8회 '늦봄통일상' 수상자로 선정되다.
- 2003.6.12
6·15 남북 정상 회담 3주년을 맞아 퇴임 후 처음으로 언론과 회견을 갖고 대북 송금 특검을 비판하다.
- 2003.8.8
만해대상을 수상하다.
- 2003.10.23
서울고등법원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다.
- 2003.11.3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개관하다.
- 2003.12.9
칠레 정부로부터 칠레공화국 대십자훈장을 수여받다.
- 2004.12.15
‘춘사 나운규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하다.
- 2004.1.29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재심 선고 재판에 참석해 사형 선고를 받은 지 2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다.
- 2004.5.10~19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순방, OECD, 노벨위원회, WHO에서 연설하다.
- 2004.6.15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한 6·15남북 공동 선언 4주년 기념 국제 학술 대회에서 특별 연설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제안하다.
- 2004.6.29
중국 방문, 장쩌민 군사위 주석 등 중국 지도자들을 면담하다.
- 2004.11.6
유럽 방문, 페르손 스웨덴 총리 및 참피 이탈리아 대통령과 회담하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세계정상회의에서 연설하다.
- 2004.12.6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방문해 제2차 동아시아포럼(EAF) 총회 특별 연설을 하다.
- 2004.12.22
주요 연설 대담집 『21세기와 한민족』 을 출간하다.
- 2005.6.12
독일 정부로부터 대십자훈장을 수여받다.
- 2005.8.10
미열과 염증 증상이 있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후 8월 21일 퇴원하다.
- 2005.8.16
병문안을 온 8 ·15 북측 당국 대표단으로부터 방북을 요청받다.
- 2006.3.21
영남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받다.
- 2006.11.4
노무현 대통령 부부와 김대중도서관 전시실을 함께 관람하고 사저에서 오찬을 하다.
- 2006.12.7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수여하는 ‘밴 플리트 상’을 받다.
- 2007.5.16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제 1회 ‘자유상’을 수상하다.
- 2007.9.17~29
미국 뉴욕, 워싱턴을 방문하다. 클린턴 전 대통령, 헨리 키신저·메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등을 만나 북핵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 2007.10.9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2007 남북 정상 회담' 결과와 향후 추진 방향 등에 대해 설명을 듣다.
- 2007.10.30
일본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명예법학 박사학위를 받다.
- 2008.4.22
24년 만에 하버드 대학을 방문해 '햇볕 정책이 성공의 길이다'를 제목으로 강연하다.
- 2008.9.11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하다.
- 2008.10.27
중국 랴오닝 성 선양에서 열린 '동북아 지역 발전과 협력 포럼' 개막식에 참석한 후 단둥 시에 있는 압록강 철교를 둘러보다.
- 2009.5.5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 부주석을 면담하다.
- 2009.5.29
故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하다. 헌화, 분향한 후 권양숙 여사를 만나 위로하다.
- 2009.6.27
6 ·15 공동 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를 주제로 연설하다.
- 2009.7.13
폐렴 증상으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서울)에 입원하다.
- 2009.8.18
서거하다.

“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아껴준것 참 고맙습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학력
- 1940.3
이화여자고등학교 졸업
- 1942.4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입학
- 1944.3
일제말 교육 비상조치에 의해 전교생이 여자청소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과로 전과
- 1946.9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입학
- 1950.5
동교 교육과 졸업
- 1954.9~1956.5
미국 렘버즈대학교 (Lambuth College) 사회학과 수학
- 1958.5
미국 스카릿대학교 (Scarritt College) 사회학과 석사 졸업

“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아껴준것 참 고맙습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경력
- 1944~1945
충남 삽교공립국민학교 부설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 1952.11~1953
여성문제연구원 발기 및 간사
- 1958, 63, 65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과 강사
- 1959~1962
대한 YWCA 연합회 총무
- 1961~1970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 1964~1982
대한 YWCA 연합회 상임위원
- 1968~1972
범 태평양 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
- 1993~1998
더불어 선교회 이사장
- 1994~1997
아태 평화재단 이사
- 1998~2002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명예 총재
- 1999~2002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명예회장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 명예이사장
대한암협회 명예회장
한국방문의 해 추진위원회 명예위원장 - 2001~2002
세종문화회관후원회 명예총재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 명예이사장

“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아껴준것 참 고맙습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수상 및 명예직
- 1940.03
이화여자고등학교 “종교상”
- 1983.02
미국 교회여성연합회 "용감한 여성상"(Valiant Women Award)
- 05
미국 스카릿대학교 (Scarritt College) 비범한 역량과 실천을 위한 여성에게 주는 "탑상" (Tower Award)
- 05
미국 테네시주 내쉬빌시 명예시민
- 1984.02
한국 인권을 위한 북미연합(The 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 "1984년도 인권상"
- 1987.09
미국 노스이스턴 대학교 (Northeastern Univ.)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
- 1988.05
미국 워시본대학교 (Washburn Univ.)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
- 1989.09
감리회본부 교육국으로부터 모범 교사패
- 1994.11
감리회본부 교육국으로부터 모 세계 성령 클럽으로부터 제5회 "세계성령봉사상(국내부문)"
(The 5th World Holy Spirit Service Award) 교사패 - 1996.10
중국 천진대학교 명예교수
- 1997.06
미국 Coral Ridge침례대학 종교교육학 박사학위
- 1998.02
“무궁화 대훈장”수훈
- 04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교(靑山學院大學校) 명예 교육학 박사학위
- 05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기장”
- 1999.10
이화여자대학교 명예 철학 박사학위
- 2000.01
제1회 미국 남가주대학교 "국제사회복지상“
- 02
미의회 국가조찬기도회 인터내셔널 디플로매틱 런천 주요연사
- 09
미국 Drew대학 (Drew College)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
- 10
서울대학교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 2001.01
펄벅 인터내셔널 ‘2000 올해의 여성상’ 수상
- 2002.05
미국 스카릿베넷 센터 "평화와 정의를 위한 탁월한 지도자상“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도덕적 인권 지도자상"
노무현 대통령 역사관
노무현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 진영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로 재직하다가 인권변호사가 되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한 뒤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 ‘작은’ 민주당 창당에 동참했다. 야권통합을 주도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되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낙선하고,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해 역시 고배를 마셨다.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구에 출마하지 않고, 지역감정의 벽을 넘겠다며 다시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이로 인해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국민경선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재임 시절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탈권위주의, 참여, 자율, 분권의 리더십으로 국정 전반을 개혁했다. 특히 국가균형발전을 강조하면서 행정도시, 혁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비전 2030’을 발표하는 등 국가장기발전전략을 세우는 데 힘썼다. 2007년 평양을 방문, 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10.4선언을 발표했다. 2008년 2월 25일 퇴임과 함께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 귀향했다. 주민들과 함께 친환경생태 중심의 살기 좋은 농촌마을 만들기에 정성을 쏟았다. 2009년 5월 23일 고향 봉하마을에서 서거했다.
출생
까마귀가 먹을 것이 없어 울고 돌아간다는 봉하마을
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태몽“백마가 말뚝에 매어 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
엄청나게 큰 말이 말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찼다.”(어머니 말씀)
유년과 학창시절
가난을 딛고 서는 시골소년의 꿈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공부도 잘하는 편이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화로는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편파적인 운영으로 1등상을 놓치게 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하여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난 일이 있다. 5학년 때는 선생님의 권유로 학생회장에 출마해 전교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작문에 대해 ‘백지동맹’을 주도했었다.졸업한 뒤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6학년 때 ‘하면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이 경험이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한 계기가 됐다.
사법고시 합격
유년시절의 꿈이 현실로
어린시절부터 고시를 공부하던 큰형님의 영향을 받아 고시에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지만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1966년 10월, 고졸 출신에게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공부를 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71년 5월경부터다.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해 2년간 연수원 생활을 거쳐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고, 1978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사시 예비(자격)시험부터 준비했는데, 책 살 돈이 없어 결국 울산 공사판에 나갔습니다. ‘함바’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받은 일당은 180원, 공치는 날이 많아 밥값도 모자랐습니다.”
군대와 결혼
고향 처녀를 만나 이룬 사랑과 결혼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군대에 갔다 오고 결혼도 했다. 그 기간 중에 믿고 따르던 큰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1968년 군에 들어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하고 1971년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복무 시절 원주 사령부에 있다가 전방부대에 자원했다. 그리고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 고향마을에서 같이 자라면서 알고 지낸 권양숙씨와 연애결혼을 했다.

“남들이 갖기 어려운 아름다운 추억도 있습니다. 몇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둑길을 걸으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늦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는 유난히도 아름다웠고, 논길을 걷노라면 벼 이삭에 맺힌 이슬이 달빛에 반사되어 들판 가득히 은구슬을 뿌려 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동화속의 세계 같은 그 속을 거닐며 아내는 곧잘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인권변호사
인생의 전환점이 된 부림사건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의 ‘부림사건’이었다. 서울의 ‘무림사건’, ‘학림사건’과 마찬가지로 군사정권에 저항하려는 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한 학생들의 상처를 보았고 외면하지 못했다. 이후 시국사건, 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변론에 열중했다.

“바르게 살아야겠다.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생각했어요. 그 뒤로 요트를 타던 것도 아예 그만두었고, 잘나가던 조세 전문가의 길도 접게 되었죠. 그때 얻은 별명이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인권변호사 ‘노변’입니다.”
6월민주항쟁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
1984년 발족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19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법률상담소’도 차렸다. 19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에 손을 떼다시피 하고 운동에 전념해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항쟁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해 9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파업 중 거리시위를 나왔다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자 노동자들의 요청으로 진상규명,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을 도왔다. 이것이 문제가 돼 제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됐다가 23일 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부산지역 개업 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 화제가 됐다.

“1985년에는 송기인 신부님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원하다가 운동가가 된 셈입니다.”
정치입문 및 청문회 스타
국민의 편에서 정치를 바꾸다
1988년 노무현은 통일민주당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에 출마, 민정당의 허삼수씨를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 대정부질문, 상임위원회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노동위원회에서는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정주영, 장세동씨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을 통해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추궁으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는 노무현을 대중정치인으로 만드는 기반이 되었으며 아직도 그를 청문회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재야 몫으로 처음에 남구를 제의받았는데, 기왕이면 허삼수와 붙겠다’며 동구를 역제의했다. 마침 사람들이 피하던 지역이라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3당합당 반대와 야권통합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원칙과 정도를 따르다
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1990년 3당 합당 때 여당에 따라갔다면 국회의원이야 세 번, 네 번 하고 장관도 일찍 하고 도지사,시장도 한번 지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떳떳하지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잘못된 정치 풍토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이 저의 큰 자부심이고 행복입니다.”
14대 총선 낙선과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
3당 야합의 유탄을 맞다
민주당의 간판으로 노무현은 1992년 3월, 14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 동구에 도전했다. 그러나 민자당으로 당적이 바뀐 허삼수씨에게 패배,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럼에도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후보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물결유세단 단장으로 민주정부 탄생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다음해인 1993년 전당대회에서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낙선이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 당원들이 나를 민주당의 가장 젊은 최고위원으로 뽑아준 것은 나의 낙선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보다 큰 시야에서 정치를 배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지방자치실무 연구소 설립
한 발 앞서, 지방화시대를 대비하다
1993년 노무현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한다. 그가 고집해 명칭 속에 들어간 ‘실무’라는 단어가 뜻하듯 흔히 접할 수 있는 정치인의 계보 사무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풀뿌리민주주의 기본을 세우고 지방화시대 개발전략을 연구하는 명실상부한 연구소로 활동했다. 이 연구소는 오늘날 지방화시대 주역이 된 인재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대통령선거 공약이 되었던 지방화시대 발전전략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직적으로 지방의원과 시민운동을 묶어보려는 노력으로 만든 것이고, 시민사회연수로 개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민사회, 시민운동이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시장 선거출마
지역주의 역풍으로 놓친 부산시장
노무현은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제1회 지방동시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자당의 문정수 후보에게 패배, 또다시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당시 경기도지사 여론조사에서도 우위를 보였고, 조순 서울시장 후보가 부시장으로 러닝메이트를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다시 부산에 도전했던 것이다. 선거 초반까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지만 김대중 총재의 사실상 정계복귀와 지역등권론 등 역풍으로 결국 낙선하고 말았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깃발을 들고 도전했습니다. 부산시민들이 민주당을 탈당하면 뽑아주겠다고 권유했지만 저는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지역주의에 영합하는 일입니다. 정치인의 원칙과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추’활동과 새정치 국민회의 입당
최초의 정권교체를 위한 선택
1995년 김대중 총재를 중심으로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된 뒤에도 노무현은 민주당을 지켰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간판으로 서울 종로구에 도전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활동을 하다가 1997년 대선 국면을 맞아 통추 내부 의견이 엇갈리자 ‘정권교체’를 위해 김원기, 김정길씨 등과 함께 그해 11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부총재가 되었다. 그리고 대선 기간 시청률 1위의 TV 찬조연설로 국민의 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은 우리들의 무한한 꿈이었다.”
종로보궐선거 당선과 현대자동차 파업중재
국회 복귀, 다시 현장으로
1998년 7월 치러진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갈등의 현장에 적극 나서 중재와 조정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활동은 1998년 8월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 1999년 삼성자동차 매각협상 중재 등이었다.

“농성과 갈등이 장기화되어 그것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더 이상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인기를 의식한다’는 언론의 보도도 있었고, 일부에서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습니다. 중재에 실패할 경우 제가 뒤집어써야 할 책임과 비난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갈등의 현장이 바로 정치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저의 생각을 바꿔놓지는 못했습니다. 다행히 중재에 성공했고 분규는 끝났습니다.”
16대 총선 낙선과 노사모의 태동
국민통합을 위한 끝없는 도전
1999년 초 다시 지역갈등을 악용한 집회가 이어지자 노무현은 다시 서울 종로지역구를 포기, ‘부산행’ 결단을 내렸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다. 많은 지지자들의 기대에도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패배, 또다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이를 계기로 그를 아끼는 전국 지지자들과 네티즌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노사모의 자발적인 태동은 국민참여를 통한 정치변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예견하게 했다.

“저는 결단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렸습니다만, 정치1번지 종로를 놔두고 사지 부산으로 갔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설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해양수산부 장관
공직사회에 새로운 기품을 만들다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 노무현은 격의 없이 직원들과 이메일 대화를 하는 등 수평적 토론문화 확산, 다면평가 등 인사평가시스템 구축에 주력해 공직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국정운영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 한편, 낮은 자세의 리더십으로 공직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가 결정하거나 우리 해양수산부 직원들이 결정하거나 그 결과는 비슷한 것입니다. 채택할 수 있는 시스템은 비슷합니다. 그 시스템을 채택하는 과정을 그분들이 토론에 의해서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스스로 결정한 그 시스템을 그대로, 약속대로 했습니다. 프로세스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분들이 인사에 대해 결과적으로 불만이 있더라도 수용해주었습니다.”
국민참여경선, 대통령후보 당선
시민주권시대 여는 새로운 이정표
노무현은 2002년 3월 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당당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당선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노무현의 당선은 ‘개혁과 통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로 가능했고, 명실상부한 국민주권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불신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개혁의 시대, 통합의 시대로 갑시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 (후보수락 연설에서)
희망돼지, 국민참여정치
국민이 만드는 변화,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
노무현은 전통적 선거캠페인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돈, 가신, 계보, 측근 없는 정치를 펼쳐온 노무현은 국민이 후원금을 내고 대통령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요청,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60억원이 넘는 국민성금을 모았다. 희망돼지 저금통, 카드와 휴대폰 결제, 희망티켓 등 다양한 형식으로 진행된 모금행사는 기존 선거자금 모금방식을 뛰어넘었으며 미디어선거, 인터넷선거, 정책선거의 원칙과 결합돼 국민참여형 선거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국민 여러분께서 우리 정치의 수준을 하루아침에 일류로 바꾸고 있다. 이것은 위대한 정치혁명이다. 저는 국민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이 정치혁명을 성공시키겠다. 우리 정치를 왜곡시켜온 분열의 지역주의를 청산하고, 제왕적 권위주의를 몰아내겠으며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정부를 만들 것이다. 국민이 주인되는 국민참여의 정치, 모든 지역과 계층이 화합하는 국민통합의 정치, 원칙과 상식이 지켜지는 신뢰의 정치, 깨끗하고 돈 안 드는 투명한 정치를 실천하겠다.”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대통령 당선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파기 선언으로 인해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욱 확고히 지지했다. 결국 노무현은 48.9%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뜨거운 소망이 이루어낸 국민의 승리이며 쾌거이다.

“저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주신 민주당 당원 동지 여러분, 개혁국민정당과 노사모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거듭거듭 감사드립니다. 저의 당선을 위해 뛰어주시지 않은 분들이나, 저를 반대한 많은 국민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 저를 반대하신 분들까지 포함한 모든 분들의 대통령으로,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당선소감)

유년과 성장
- 1946.12.12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 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 1959
경남 김해시 진영읍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영중학교에 입학하다.
- 1960.2
이승만 대통령 생일기념 글짓기 행사에서 동급생들과 백지를 내다.
- 1962
부일장학생에 선발되다.
- 1963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다.
- 1966.5
봉하마을 뱀산에 토담집 마옥당(磨玉堂)을 짓고 고시 공부를 시작하다.

도전과 성취
- 1968.3.8
육군에 현역으로 입대하다.
- 1971.1.23
강원도 인제에서 육군 상병으로 만기제대하다.
- 1971
3급(현 5급) 공무원 1차 시험과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다.
- 1973
권양숙 여사와 혼인하고 장남 건호를 얻다.
- 1975.3.26
제 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하다.
- 1975.9.11
장녀 정연 태어나다.
- 1976
아버지 노판석씨 사망하다.
- 1976
사법연수원 7기를 수료하다.
- 1977.9.6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하다.
- 1978.5.5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다.

인권변호사
- 1981.10
부림사건 변론을 맡다.
- 1982
문재인 변호사와 공동 사무실(현 법무법인 부산)을 열다.
- 1982.5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변호를 맡다.
- 1984.8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맡다.
-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울산, 마산, 창원, 거제, 구미공단 등을 다니며 노동운동 변론을 지원하다.
- 1986.6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모태가 된 정법회 창립에 참여하다.
- 1987.2.7
고 박종철군 추모대회에서 연행되어 부산시경 대공분실에 구금되다.
- 1987.5.20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다.
- 1987.9.3
대우조선 고 이석규씨 유족을 돕다가 ‘장례방해’, ‘제3자 개입’으로 부산구치소에 23일간 구속되다.
- 1987.11.6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당하다.
- 1987.12.2
13대 대통령선거에서 공정선거감시운동 부산본부장을 맡다.
- 1988.4.26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부산 동구)되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이상수, 이해찬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활동하다. - 1988.6.4
변호사 업무정지 해제되다.
- 1988.10~12
‘제5공화국비리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청문회 스타’로 각광받다.
- 1989.3.17
제도정치에 한계를 느끼고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다.

인권변호사

통합의 정치
- 1990.6.15
3당 합당에 반대, ‘작은 민주당’을 창당하다.
- 1990.7.13
민자당의 방송법 등 날치기 처리를 규탄하며 김정길, 이철, 이해찬 의원과 함께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다.
- 1991.9.17
야권통합을 주도,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되다.
- 1992.3.24
14대 국회의원 선거(부산 동구)에서 낙선하다.
- 1992.10
김대중 대통령 후보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을 맡아 14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다.
- 1993.3.11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되다.
- 1993.9.28
지방자치 실무연구소를 열다.
- 1994.4.15
부산지역 정책연구소를 열다.
- 1995.6.27
1회 지방선거(부산시장)에서 낙선하다.
- 1996.4.11
15대 국회의원 선거(서울 종로구)에서 이명박, 이종찬 후보와 경쟁하여 낙선하다.
- 1996.11.9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창립대회에 참여하다.
- 1997.6.30
SBS라디오 ‘노무현, 김자영의 뉴스대행진’ 진행을 시작하다.

원칙과 소신
- 1997.11.13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다.
- 1997.12.3
KBS 1TV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 후보 첫 찬조연사로 방송연설을 하다.
- 1998.1
어머니 이순례씨 사망하다.
- 1998.7.21
15대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다.
- 1998
정치업무 표준화 시스템 ‘노하우 2000’을 개발하다.
- 1998.7~8
현대자동차 파업사태와 관련, 중재에 나서다.
- 1992.2.6
새정치국민회의 동남지역정책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다.
- 1999.3
부산 자동차산업 살리기를 위한 삼성자동차 매각협상 중재에 나서다.
- 1999.7
정책제안집 ‘삼성차 문제 이렇게 해결합시다’를 제작하다.
- 2000.4.14
16대 국회의원 선거(부산 북강서 을)에서 낙선하다.
- 2000.6.6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창립총회가 열리다.
- 2000.8.7
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하다.

원칙과 소신
- 2001.3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및 최고위원에 선임되다.
- 2001.5.22
대우자동차 살리기 공청회에서 ‘부산지역 삼성차 살리기 운동’ 사례를 발표하다.
- 2001.8.13
대우자동차 서포터 광고모델로 나서다.
- 2001.9.6
노무현 후원회 부산행사에서 대통령 선거 도전을 선언하다.
- 2001.12.10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 기념회 및 후원회 행사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다.
- 2002.2.23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 경선에 등록하다.
- 2002.3.16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 광주경선에서 1위를 기록하며 ‘노풍’을 일으키다.
- 2002.4.27
국민참여 경선을 통해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되다.
- 2002.11.25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와 후보단일화에 성공하다.
- 2002.12.19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되다.
- 2002.12.30
제 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현판식을 하다.

대한민국 대통령
- 2003.2.25
16대 대통령에 취임하다.
- 2003.4.18
청남대를 국민들에게 돌려주다.
- 2003.12.17
중대선거구제, 도농복합선거구, 권역별 비례대표제 등을 제안한 정치개혁 입법 관련 서한을 국회에 보내다.
- 2004.1.17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을 확정하고, 60년 만에 용산을 돌려받다.
- 2004.1.29
균형발전 3대 특별법 서명식을 하고, 지방화와 균형발전 시대를 선포하다.
- 2004.3.12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하다.
- 2004.5.14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하다.
- 2004.10.18
과학기술부를 부총리 부처로 승격하고, 장관을 부총리로 임명하다.
- 2005.7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위한 선구구제 개편과 함께 대연정을 공식 제안하다.
- 2006.4.3
국가원수로서는 처음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하다.
- 2006.6.5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시작하다.
- 2006.1.13
직접 개발에 참여한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이지원’(e知園)을 특허등록하고,
누구나 무상으로 활용할 수 있게 공개하다. - 2006.4.25
독도 영토주권 문제에 대한 한일관계 특별담화를 발표하다.
- 2006.8.30
국가장기발전전략 ‘비전 2030’을 발표하다.
- 2007.1.9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시기를 일치시키는 개헌을 제안하다.
- 2007.6.2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21세기 한국, 어디로 가야하나’를 주제로 특강을 하다.
- 2007.6.29
한미자유무역협정 협상에 최종 합의하다.
- 2007.7.20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의 기공식을 하다.
- 2007.10.2~4
평양을 방문하여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10·4 선언을 발표하다.

2003
- 04.18
23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 참석
- 04.22
전국주부교실 지도자대회 참석
- 05.14
뉴욕 한글학교 교사들과 간담회
- 05.27
이웃돕기 유공자 초청 오찬
- 05.30
대한간호협회 창립 80주년 기념회 참석
- 05.31
학교폭력예방운동관계자 초청 격려
- 06.07
도쿄 한국학교 등 방문
- 06.12
대구 성보 장애인학교 및 재활원 방문
- 06.13
도서벽지어린이 초청 다과
- 07.02
2003 유럽 코리아재단 장학프로그램 발족식 참석
- 07.03
씨랜드화재 유가족 초청 위로 다과
- 07.29
학생 수련원 현장 점검
- 07.31
재외한글학교 교사 초청 격려
- 09.18
전국 사회복지 관계자 초청 오찬
- 09.19
전국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시상식 참석
- 10.05
2003 세계한민족 여성네트워크 참가자 만찬
- 10.23
싱가포르 한인 학교 방문
- 11.10
순천 부영초등학교 '기적의 도서관'개관식 참석
- 11.26
적십자사 '사랑의 선물'제작 봉사
- 12.08
소년원 자선공연 참석
- 12.16
희귀병 어린이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잔치

2004
- 02.06
미아찾기센터 방문
- 06.04
서울 국제도서전 참관
- 06.18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 가족과 오찬
- 06.21
모범용사 초청 다과회
- 07.09
‘2004 세계 한민족 여성네트워크’ 참가자 초청 오찬
- 09.03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명예회장 추대
- 09.07
방송대 명예후원회장 추대
- 09.15
국립중앙도서관 500만 장서 기념행사 참석
- 09.21
독립유공자 후손 접견
- 09.22
모스크바 한국학교 방문
- 10.04
세계박물관대회 참석
- 12.21
장애인 복지시설 방문
- 12.29
푸드뱅크 기금마련을 위한 ‘주먹밥 콘서트’ 참석

2005
- 01.25
각계 여성인사 ‘1호’ 오찬
- 01.28
중랑구 신내 노인요양원 방문
- 03.18
국립극장 후원회 명예고문 위촉 및 공련관람
- 03.24
아일랜드 대통령 명예법학박사 학위 축사
- 04.29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관계자 접견
- 05.25
대한 YWCA 대표단 오찬·격려
- 06.03
‘2005 암중모색’ <암을 이긴 사람들> 격려 만찬
- 06.20
첫 아시아 개최 세계여성학대회 개막축사
- 07.18
‘어린이와 도서관 한마당’ 참석
- 08.24
APEC 여성지도자네트워크 개막 축사
- 08.26
세계 여성과학기술인대회 개막연설
- 08.31
학교·여성폭력 원스톱 지원센터 방문
- 09.07
여성관리직 공무원 초청 오찬
- 09.11
멕시코 ‘찰코 소녀의 집’ 방문
- 09.24
부천 도서관 문화 한마당 개막식 참석
- 09.28
적십자봉사원 대축제 참석
- 10.27
제41일 전국여성대회 축사
- 11.15
2002 전동휠체어 나눔식 참석
- 11.18
APEC 정상부인 환영 오찬
- 12.02
구세군 자선냄비 시종식 참석
- 12.07
2005 전국자원봉사자대회 축사

2006
- 01.26
아동복지시설 퇴소청소년 방문
- 02.08
안동 하회동 탈 박물관 방문
- 02.23
방송통신대학 학위수여식 축사
- 03.02
국군간호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식 축사
- 03.08
이집트 카이로 한국학교 방문
- 03.13
알제리 알제대학교 한국어과정 수강 학생 접견
- 03.31
제1회 한·영 여성과학자포럼 참가자 청와대 초청
- 04.20
제26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 축사
- 04.28
어린이 교통안전지도 체험
- 05.02
세계여성경제인총회 참석
- 05.03
학교 안전점검의 날 시범행사 참석
- 08.20
서울 세계도서관정보대회 개막식 참석
- 10.14
세계 누에산물전 참석
- 10.18
김천 시립도서관 방문
영화초등학교 방문, 문화예술교육수업 참관 - 15.15
시각장애인 전자정보단말기 전달식 참석
- 11.18
베트남 한국문화원 개원식 참석
- 11.20
캄보디아 국립소아병원 방문

2007
- 02.08
부산 생활과학교실 관계자 초청간담회
- 04.12
청와대 모유수유소 개소식 참석
- 04.25
여성경제인 대표 격려 오찬
- 05.01
‘일죽 작은 도서관’ 개관행사 참석
- 05.04
소록도 어린이들 청와대 초청
- 05.08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개막 축사
- 05.23
예술의 전당 명예후원회장으로 추대
- 06.08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 한국실 개관 축하메시지
- 06.19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발족식 참석
- 06.20
소아암 극복어린이 초청 격려오찬
- 07.02
과테말라 어린이집 방문
- 09.07
한국어 교육 관계자 및 우수 학생 격려 간담회
- 09.12
제1회 대한민국 도서관 축제 개막식 축하
- 09.13
세계여성포럼 2007 개막 축사
- 09.21
국립암센터 명예후원회장 위촉
- 10.02
북측 여성지도자들과 간담회
평양시내 인민대학습당 방문 - 10.18
사우디아라비아 국비유학생 초청 오찬
- 10.24
재일한국부인회 접견 다과회
문재인 대통령 역사관

실향민의 아들
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의 시골 농가에서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6.25 한국전쟁 당시 흥남에서 피난을 내려와 거제에 정착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하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가 경남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평소 과묵했던 아버지께서는 자랑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않고 교복을 맞춰주겠다며 그를 국제시장에 데리고 가셨다고 한다.가난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많았지만, 그에게 가난은 오히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 어릴 적 가난했던 기억은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되어, 불우하고 어려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돕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격동의 청년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조리하고 불공정한사회에 대한 저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국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문재인 대통령은 1975년 유신독재 반대 시위를 이끌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강제 징집되어 특전사령부에 입대하였다.

인권변호사
1982년,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쳤지만, 유신반대 시위 전력이 결격 사유가 되어 판사 임용에 탈락하였다. 대형 법률사무소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것’이 변호사의 소임이라고 생각한 그는 결국 이런 제안을 마다하고 부산으로 돌아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때 처음 맺어졌다.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은 학생운동 사건과 노동운동 사건들이 많았다. 그는 탄압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을 찾아온 노동자들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진정으로 공감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들을 변론했다. 당시 학생회 활동을 했던 많은 학생들은 ‘그 당시 문재인 변호사의 얼굴을 지겹도록 보았다’고 기억한다.

정치에 눈뜨기 시작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치적 관심을 일깨워준 최초의 스승은 바로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장삿길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책을 사다 주신 덕에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중・고등학교 6년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길렀다. 집에 이웃집 대학생이 찾아오면 아버지께서 사회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곤 하셨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과 식견들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분석적 태도를 기르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참여정부
2003년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들으면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만 했을 뿐, 국정운영 경험이나 행정경험이 없었던 그였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설득 끝에 민정수석 자리를 받아들였다.
1년여 동안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민정수석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네팔 히말라야를 여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접하고 곧장 귀국하여 탄핵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하여 법적 대응 전반을 도맡았다. 탄핵재판 중에 있었던 탄핵반대 촛불시위 현장에도 참석하였다. 탄핵심판이 기각되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대통령의 친구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2009년 5월, 갑작스러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상주가 되어 서거 발표부터 장례 준비를 위한 회의주재까지 도맡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구였고, 동지였으며,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범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하였다. 2015년부터 2016년 1월까지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과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로 활동했다. 2016년 11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 앞장섰으며,이게 나라냐라는 탄식과 함께 촛불을 든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이들과 시종일관 함께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결정된 조기 대선에서 든든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여 41.1%의 지지율로 제 19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일어선 그는 이번에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 그는 직책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대통령의 지위가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만약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고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국민들과의 소통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 2017.05
제 19대 대한민국 대통령
- 2015.12~2016.01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 2015.02~2015.12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 2012.05~2016.05
제 19대 국회의원
- 2011.12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 2011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 2010.08~2012.04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 2009.09~2010.08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상임이사
- 2007.08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 2007.03~2008.02
대통령비서실 실장
- 2005.01~2006.05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 2004.05~2005.01
2004.05~2005.01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 2003~2004.02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 2001~2003
부산시교육청 행정심판위원
- 2001~2002
노동자를 위한 연대 공동대표
- 1996
부산 YMCA 이사
- 1995~2001.02
법무법인 부산 대표변호사
- 1995~2002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 1994
노동자를 위한 연대 노동상담소장
- 1989~2002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부이사장
- 1988
한겨레신문 창간위원
-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 1984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
- 1980
제 22회 사법시험 합격
- 1980
경희대학교 법학과 졸업
- ~1971
경남고등학교 졸업
- ~1968
경남중학교 졸업
- ~1965
남항초등학교 졸업
- 2015.12
제17회 백봉신사상
- 2014.12
제16회 백봉신사상
- 1980
경희대학교 법학과 졸업
- ~1971
경남고등학교 졸업
- ~1968
경남중학교 졸업
- ~1965
남항초등학교 졸업
- 2015.12
제17회 백봉신사상
- 2014.12
제16회 백봉신사상

김정숙 여사는 숙명여자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서울시립합창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했다. 대학 시절에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결혼 후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현재는 영부인으로서 지역 곳곳을 찾아다니며 국민들과 따뜻한 소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정숙 여사와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인의 소개로 학교 축제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처음 만나 알고 지내다, 1975년 독재정권에 맞서는 시위에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문재인 대통령을 간호하면서 애정이 싹텄다. 문재인 대통령이 군대에 있을 때 간식 대신 안개꽃을 한 아름 사갔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권위를 내려놓고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김정숙 여사 역시 국민들에게 소탈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 시절, 김정숙 여사는 매주 1박 2일 일정으로 광주 광역시를 방문하여 경로당 배식봉사를 시작으로 다양한 복지시설과 기관들을 찾았으며, 지역 종교지도자, 시민사회활동가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시민들을 만나 경청의 시간을 가졌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에는 직접 ‘영부인’이라는 호칭 대신 ‘여사’로 불러달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청와대 입주를 위해 사저를 떠나면서 꽃다발과 화분을 인근 경로당에 기증하고, 청와대 관저 도배 공사현장을 직접 찾아 직원들에게 간식을 제공하는 등 특유의 쾌활한 성격으로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권위를 내려놓은 친근한 행보에 국민들로부터 ‘유쾌한 정숙 씨’, ‘친절한 정숙 씨’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녀는 “퇴근길에 광화문에 나가 막걸리 한 잔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남편처럼, 나 역시 남대문시장에 가서 장을 보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며 권위를 내려놓고 소탈하게 살고자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 2017
제 19대 대한민국 영부인
- 1978~1982
서울 시립합창단 단원
- 1974
경희대학교 성악과 입학
- 1973
숙명여고 졸업